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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Sep 24. 2021

오래된 친구와 새 친구

눈 내리던 어느 날의 일기.

눈이 펄펄 내린다. 회색 공기에 불규칙한 흰 점을 흩뿌리며. 발가락을 오므리고 조심조심 운행하는 자동차들 사이로 앰뷸런스가 지나간다. 도시의 눈이야 천덕꾸러기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눈에 나는 설렌다. 어디선가 새벽 종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고...


2년에 한 달 정도 한국을 방문해 친지를 만나는데, 보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반갑고 좋지만, 이번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단 생각을 했다. 운 좋게도 그런 기회가 생겼고, 지난밤 그분들을 뵙고 설레는 마음을 계속 느끼고 싶어 이것저것 하다가 늦게 잠들어 버렸다. 결과는 근육통... 결리는 어깨와 지끈 거리는 머리를 쥐고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고 있다. 문득 ‘사랑은 눈과 같다.’는 비유가 생각난다. 이 구절은 ‘내릴 때는 아름답지만 그치면 추해진다.’로 끝나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모든 인연이 비슷해지는 것 같다. 사랑이든 아니든, 오래된 사이든 새로 만난 사이든.


인생이 연극이라면, 오랜 친구의 눈빛은 따뜻한 조명이다. 그들은 나의 조각을 가지고 있어 나는 거울처럼 그들에게서 나를 보기도 하고, 잊고 있던 나의 조각을 찾기도 한다. 스토리가 강화되는 시간이다. 반면 새 친구가 쏘는 빛은 스포트라이트처럼 밝아,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게 한다. 주목받는 흥분, 이제부터 새로운 장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 그가 가져오는 새로운 세상에 응답하여 새로운 내가 나타난다. 어른의 교제는 이 모든 관계를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함이 있어 좋다. 맑은 날은 맑은 날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모처럼 우연이 선사한 풍경의 변화에 감사한다.


그렇지만 어른의 교제엔 시간에 쫓김, 이해관계, 편견, 두려움과 귀찮음, 쓸데없는 자존심 등등의 방해가 있다. 특히 새로운 관계에 이 방해는 치명적이라, 좋아해도 더 좋아하고 싶다는 생각만을 간직한 채 만나지 못하다가 설익은 열매가 떨어져 버리듯 잊히기도 한다. 쌓이지도 않고 녹아버리는 눈처럼, 눈이 내렸단 사실조차 거짓말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어릴 때 맘껏 심심해하며 낭비했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고, 어른이 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효율이 낮은 활동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익숙해진 사회 모드를 끄는 것부터 말이다.


 하지만 눈이 내리고 그 눈이 그치고 또 눈이 내리기를, 설레는 나 자신이 말라붙어버리지 않기를, 아픔이 있기를, "그 아픔까지 사랑" 하길 바라며 아직 그칠 기색 없는 눈을, 닳고 닳은 아스팔트를 온통 보드랍게 덮은 하얀 눈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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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시진: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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