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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니 Oct 29. 2021

과학, 믿음, 그리고 안티 백서에 대하여

집단 면역이 주는 깨달음.

현직 의사의 회고록인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보면 수혈을 금지하는 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린 자식이 응급 상황인데 수혈을 거부하는 부모가 있고, 의료진은 논의 끝에 몰래 수혈을 해서 아이를 살리는데, 의료진 중 같은 종교인이 있어 그 부모에게 사실을 알린 것. 부모의 항의를 받은 동료들은 분노했고 그는 일선에서 일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몇 년 후, 필자는 그가 수혈을 대체할 수 있는 물질을 개발하는 연구직에 가게 된 걸 알게 된다. 같은 종교인들의 생명을 구할 희망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국 내 그 종교인의 숫자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므로 그 연구는 분명 가치가 있고, 그 종교인이 아닌 사람도 저 연구의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이가 죽을 지경인데도 믿음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분노하고, 의사들의 입장에 백배 공감했지만, 이 결말이 참 만족스러웠다. 그는 수혈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절박하게 연구에 매진할 것이고, 이것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하면, 죽고 사는 문제는 과학으로만 이뤄지는 결정도 아니고. 첫 에피소드를 귀신 이야기로 시작하는 의사 작가는 성공 투자자로도 유명하니, 역시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포용력이 중요하다 싶다.


이 이야길 한 건 최근 이곳에서 무엇보다 화제인 백신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락다운- 5km 밖 이동 금지, 하루 2시간 이상 외출 제한, 밤 8시부터 통금, 생필품 등 제외한 모든 가게 학교 셧다운, 5인 이상 모임 금지, 2인 초과 동반 외출 금지, 생명을 당장 위협하지 않는 질병에 대한 수술 등의 무기한 유예, 소방/경찰/의료 서비스 외 전 직업 재택근무 등- 을 지난 2년간 총 10개월 정도 겪은 이 도시는 드디어 다시 개방을 선포했다. 곧 백신 접종률이 90%에 도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2차 백신까지 접종한 사람들을 위한 경품 사이트까지 운영하며 집단적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도 안티 백서가 있고... 히피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미권답게 백신을 안 맞을 자유를 보장하라며 데모도 하고 그런다. 사실 정부가 "백신을 맞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면서 한편으론 백신을 맞아야만 직업에 복귀할 수 있는 직업 리스트, 백신을 맞아야만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 등을 발표한 것은 사실 눈 가리고 아웅 느낌이긴 하다. 그러나 백신과 집단 면역의 중요성을 여기서 내가 말할 필욘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 주변의 안티 백서 이야기다.


안티 백서들의 이유에는 빌 게이츠 조종설, 자력설, 백신 무용설 등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곳 "점잖은" 안티 백서들의 이유는 대체로 "검증 기간 부족, 실험 케이스 부족"이고, 그들은 "먼저 백신 찬성하는 사람들이 맞고 괜찮아 보이면 맞으려고"라고 한다. 상대를 자신을 위한 실험용 쥐로 사용하겠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그들의 무례함이라니. 어쨌든 최근엔 아이비리그 90% 이상이 접종했다고 하는데, 이 고급 쥐들이 그들의 까다롭고 조심스러운 취향에 맞길 희망한다.


내 주변 안티 백서 비슷한데, 그와 이야기할 때마다 답답하면도 그의 세세한 사정을 아니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체로는 아무 말 않고 만다. 그의 가치 판단은 그의 고립된 생활과 무력감, 두려움 등에서 비롯됐는데, 그와 비슷한 처지를 겪어 본 난, 그런 것들이 얼마나 사람의 시야를 좁게 만드는지 알기 때문에 그냥 그가 말하게 두고, "어, 난 맞았는데 아무렇지 않더라." 같은 말이나 가끔 던질 뿐이다. 최근 이 분은 그 때문에 따돌림 비슷한 걸 당해, 피해자 의식까지 생겼는데, 꼭 어떤 종교인들 같다. "난 안티 백서 아냐, 나도 백신 맞고 싶지, 하지만 (비과학적 개인적 불안). 그런데 날 왜 핍박해?" - 정말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안티 백서라고요... 어이구 답답해.


그러나 내게도 문제 있다. 과학적 사고를 따르는, 그래서 백신의 필요성을 납득하는 합리적인 사회인으로서, 나는 의심이란 지적인 습관과,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는 자유를 지지하고 싶다. 하지만 집단 면역이란 것은 안타깝게도 그런 자유를 무한정 보장하지 않는다. 아니 그 전에, 나는 그 신기술 백신이란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우리 세대 최고의 전문 인력이 만들고, 대다수의 정부가 인정한 과학 기술을 그냥 받아 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다단계 설명회에 끌려갔을 때, 한 연사가 이런 명언을 했다. "TV의 작동 원리를 모른다고 TV를 즐길 수 없는 게 아니잖아? 여기 수익의 증거가 있으니 그냥 이 시스템이 좋다는 걸 믿어."


의료라는 것도 사람의 일이니 사고도 있고 미스도 있고 오류도 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죽은 사람 살리는 거 빼고 다 한다며 왜 이런 것도 이 따위로 밖에 못해? 란 생각이 든다. 특히 생존 확률, 부작용 확률, 이 따위 말을 들으면, 내 인생과 생명을 가지고 도박을 하란 말이냐? 라며 강렬한 불안과 거부감에 사로잡힌다. 이성은 확률이 높은 쪽을 선택하라 하지만, 감성은 강요당하는 듯한 기분에 화가 난다. 이런 강요가 새삼스럽진 않다. 페이스북이든, 구글이든, 사회생활에 꼭 필요하게 된 매체를 이용하려면 긴 동의서에 백 퍼센트 동의를 해야 한다. 이건 하고 이건 안 할 테니 차라리 과금을 하라던가, 그런 협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똑똑하고 더 권위 있는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윤리적으로 적어놨겠지 하고 믿으며 읽지도 않고 동의 버튼을 누른다. 거기엔 민주적 결정 과정 같은 건 없다. 동의, 아니면 소외. 그러나 실리콘 밸리에선 정기적으로 스캔들이 터지고, 사람들은 내 선택을 이들에게 위임하는 게 과연 옳은가, 란 의문을 던지곤 곧 잊어버린다. 어차피 권력은 그쪽이 가지고 있고, 나는 그들에게 이미 백 퍼센트 동의를 해 버렸으며, 어차피 나는 그들이 뭘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무력감을 느끼거나, 음모론 같은 걸 떠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사는 직접 내 피부를 찌르는 경험이다. 이제 생각을 피할 수 없는 때가 왔다. 부작용은 '아주 적다' 지만, 만약  영 점 영 몇 퍼센트의 확률로 내가 당장 죽어 넘어지면, 소중한 내 자식과 연인, 부모는 어쩔 것인가? 죽지 않는다고 해도, 고통이나 장애에 시달릴 나의 인생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백신 기술, 믿을 수 없는 '똑똑하고 권위 있는 사람'들. 지금 숨 쉬고 느끼고 생각하는, 굳건하다 믿었던 나란 존재는 사실 불확실함과 미지란 어둠 속에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러한 두려움과 불안에 과학은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확률이란 학문에서 나는 이 세상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1이란 숫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 까놓고 보면 우리는 백신 뿐 아니라, 길을 가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위험 속에 살고 있다. 불행, 또는 죽음은 참 랜덤하게 찾아오고,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부조리를 어떻게 퍼센트 같은 것으로 납득하랴. 그래서 하루키를 비롯한 동서고금의 작가들이 책을 썼고, 사랑과 복지 제도와 종교 같은 게 발명된 게 아닌가. 그러나 종교는 최근 심히 구식이 됐고, 떠오르는 스타, 음모론은 답이 정해진 믿음이란 점에서 신세대의 종교라 할 만하다. 외로운 개인에게 특히 강렬하단 점도.


그러므로... 안티 백서를 너무 미워하말자는 생각이 든다. 집단 면역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이 있다면, 모두가, 설령 안티 백서라고 해도,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조롱보단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길. 내가 먼저 백신을 맞고 당신을 지켜줄 테니까, 어서 따라오길.


그리고 그놈의 음모론, 그 곰팡이가 피어나는 곳- 모두의 이해와 동의 없이 사회를 변화시켜 버리는 기술과 소외 (그리고 미디어)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이젠, 정말로 생각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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