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번위스키와 함께한 켄터키 루이빌 여행기
프롤로그: 어쩌다 나는 버번위스키를 탐닉하게 되었나? (TMI 주의)
버번위스키를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본래 나는 스카치위스키 중에서도 싱글몰트 위스키의 팬이었다. 밤에 Glencairn(글렌캐런) 잔의 밑동까지만 채운채, 물을 안주삼아 입을 헹궈가면서 천천히 음미하는 위스키 한잔은 적적한 유학생활을 버티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미국 땅일지라도 스카치위스키는 영국에서부터 건너온 수입품이고, 가격이 만만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한국에서 위스키에 매겨지는 살인적인 주세법(증류주의 경우 공장 출고가의 72%, 수입품에 붙는 관세는 덤)이 적용되지 않기에 스카치위스키도 한국의 3분의 2 가격에는 살 수 있지만, 여전히 비싼 건 사실이다.
어느새 코비드 시대가 끝나가며 모두가 두려워하던 양적완화의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고, 인플레이션과 고환율이 모두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이 혹독해지면 금주를 하는 게 당연하나, 이 어리석은 자는 술을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다른 술을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예산과 만족감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찾아낸 것이 미국의 자랑스러운 국산품, Bourbon whiskey(버번위스키)다.
미국에서의 버번위스키 가격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물론 그만큼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숙성 년수가 대체로 적은 것(이 이유는 후술 하겠다)도 이유라고 할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국산품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만만한 가격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았던 버번위스키도 한국으로 가면 가격이 무려 두배가 되기도 한다. 나중에 한국의 주류백화점에 가서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같은 헛소리 안 하려면 지금 즐겨둬야 한다.
버번은 거칠다는 편견 때문에 한동안은 멀리했었으나, 계속해서 먹다 보니 어느새 버번 특유의 스파이시한 맛과 거친 목 넘김에 길들여져 버렸다(뇌이징). 게다가 스카치위스키도 그러하듯이 버번위스키도 엔트리급이 있는가 하면 하이엔드급인 녀석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절대로 모든 버번위스키가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열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특히나 가격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다.
그렇다면 버번위스키는 무엇인가?
버번위스키는 나름의 엄격한 기준 아래 정립된 위스키이다. 긴말할 것 없이 핵심만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다.
1. 미국에서 생산되어야 한다.
2. 최소 51% 이상의 옥수수를 증류에 사용해야 한다.
3. 반드시 불에 태운 새 오크통만을 사용해야 한다.
4. 증류 시 알코올 도수가 80% (160 proof)를 넘지 않아야 한다.
5. 오크통에 넣을 때 알코올 도수는 62.5% (125 proof)를 넘지 않아야 한다.
6. 숙성 후 오크통에서 병으로 병입 시에 알코올 도수가 40% (80 proof)를 넘겨야 한다.
7. 색소나 조미료는 일절 첨가 불가하다.
나도 전문가는 아니라 각각의 조항이 왜 생겨났는지, 그게 어떤 현상을 일으키기에 제한조건으로 선정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다양한 버번위스키들이 이런 엄격한 조건들을 거쳐서 버번위스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것을 알고 나니, 가볍게 지나쳤던 것들도 다시 보게 되었다.
한 가지 특이했던 건 3번 조항인데, 셰리와인을 숙성시켰던 오크통에 숙성시킨 '셰리오크 에디션' 등의 제품도 출시하곤 하는 스카치위스키와는 달리 버번위스키는 그러한 배리에이션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때문에 한번 버번위스키를 숙성시킨 오크통은 다른 목적(다른 종류의 술을 숙성하는 용도)으로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서론이 너무너무 길었다. 이제부터 사진과 함께 진짜 여행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동안 버번위스키에 심취해 있는 중에, 지인과 함께 Kentucky(켄터키)에 위치한 가장 큰 도시인 Louisville(루이빌)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올 기회가 생겼다.
당연히 켄터키 하면 버번위스키, 버번위스키 하면 켄터키 아니겠는가? 버번 양조장 투어가 그렇게 이번 여행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루이빌까지의 거리는 차로 3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다. 켄터키 주도 인디애나 못지않은 시골 동네이다 보니 1박까지 하면서 여행하기엔 조금 아까운 곳이지만, 다행히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이렇게 차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버번위스키 양조장 투어는 인터넷으로 쉽게 예약을 할 수 있다. 우리는 Evan Williams distillery로 가기로 했다. Evan williams 위스키를 마셔본 적은 없었지만, 투어를 제공하는 곳이 루이빌 중심의 Bourbon district에 위치하고 있었고, 구글 리뷰도 양조장 투어 중에선 가장 괜찮아서 이곳으로 결정했다.
때는 가을이 한창이던 날씨라, 아침엔 좀 쌀쌀하다가도 햇빛이 들면 딱 적당한 날씨가 되곤 하는 완벽한 날씨였다. 11시에 예약된 양조장 투어에 참석하기로 했고, 조금은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잠깐 돌아다니다가 투어 장소에 입장했다. 투어 시작을 기다리는 잠깐 동안 로비를 둘러봤는데, 생각한 것보다는 잘해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Evan williams의 버번위스키는 전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이 팔리는(1위는 Jim beam) 버번위스키라고 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버번위스키를 증류하기 시작한 Evan williams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만들어졌으며, 1783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상업 증류소를 세운 이래 꾸준히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증류소이다. 특히나 가장 기본이 되는 Black은 4~5년간 숙성되어 버번 치고는 부드러운 맛과 향을 내며, 국내에는 2021년에 처음으로 정식 수입이 시작되어 요즘은 30,000원 의 합리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는 가성비 버번위스키이다.
이윽고 투어가 시작되었고, 가이드가 먼저 홍보영상을 보여주고,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투어 일행 중에 동양인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나이대가 전부 지긋하신 분들일 줄은 몰랐다. 대부분이 백인 노부부들이었다.
시음을 제외하고 투어 자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증류시설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본래 증류소가 아니고 다운타운에 마련된 별도의 장소이다 보니, 시연을 위한 증류시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실제로 증류를 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증류한 것도 제품으로 낸다고 한다.
증류시설을 다 돌아보고,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시음의 시간이 돌아왔다. 사실 이게 위스키 투어의 본질 아니겠는가? 고즈넉한 분위기에 저조도의 조명이 켜진 바에서 가이드가 바텐더의 위치에 서서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시음해본 위스키는 총 4가지였고, 각각 작은 사이즈의 Glencairn(글렌캐런) 잔에 담겨 나왔다.
1. Evan williams
2. Evan williams 1783
3. Evan williams master's blend
4. Evan willams 12 years
술을 감히 평가할 만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을 이야기해보자면, 역시나 4번이 오랜 시간 숙성을 한 덕분에 가장 부드러웠다. 1, 2번은 큰 차이를 모를 정도로 비슷한 편이었고, 3번은 버번 특유의 스파이시하면서 씁쓸한 느낌이 강하게 나는 날것의 와일드한 느낌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녀석은 버번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웠던 고숙성 버번위스키인 4번이었다. 페어링에 사용된 위스키 봉봉은 생각보다 그렇게 술의 함량이 크지 않아서인지,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잠깐, 고작 12년이 고숙성 위스키라고?
일관되게 서늘하고 습한 지역에서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영국의 스카치위스키와는 달리, 대부분의 버번위스키는 미국의 남동부에 위치한 켄터키의 변화무쌍한 날씨 아래에서 숙성이 이뤄진다. 이러한 기후 때문에, 원액이 오크통에 스며들어 향을 머금었다가 다시 원액에 합류하는 과정이 단기간에도 활발하게 이뤄지지만, 숙성 중에도 계속해서 발생하는 증발과 확산에 의한 손실량(Angel's share, 천사의 몫이라고 부른다)이 스카치위스키에 비해서는 매우 큰 편이다. 이러한 이유로 스카치위스키가 20년~30년 정도 숙성시켜줘야 유니크하게 꼽히는 반면, 버번은 10년 이상만 숙성시켜도 고급 버번의 축에 속한다. Evan williams 12년 750ml도 시중에서는 $180(한화 22~23만 원) 선에 판매되고 있다.
운 좋게도, 일행 중 한 분이 술을 못 마시는 분이라서 내가 그분의 술까지 냉큼 가져다 삼켜버렸다. 안 그래도 시음 시간이 15분 정도로 상당히 짧았는데, 8잔을 연거푸 들이키니 제법 알딸딸해졌다. 1인당 제공량인 4잔을 15분에 마시기에도 약간은 촉박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8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이키고 나니 피가 머리로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매우 좋았다.
시음이 끝나고, 정신 차려보니 후딱 지나가버린 1시간을 뒤로하고 기념품점에 도착했다. 투어를 통해서 브랜드에 대한 호감과 애착을 고양시킨 후, 마지막에 시음을 통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그 틈을 타서 굿즈를 팔아먹는 전과 확대 전략으로 상당히 괜찮은 수익구조를 창출한 것 같았다. 나도 술김에 혹해서 뭐 하나 골라담을뻔했다. 하지만 내가 사고 싶었던 Evan williams single barrel이 정작 없어서 실망해버렸다.
버번위스키 투어를 마치고, 거리에 나오니 술기운 때문인지 후덥지근했다. 겉옷을 벗어 손에 들고, 낮술의 들뜨는 기분을 장착한 채 이곳저곳을 더 둘러보았다. 바로 근처에 Louisville slugger museum이 있어서 한번 들어가 보았다. 입구부터 거대한 야구방망이가 건물에 기대 진채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워낙 야구는 국내 리그든 미국 리그든 관심이 없어서 "야구방망이 하나 갖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라고 생각했는데, 꽤나 역사가 있는 야구배트 브랜드라고 한다. 실제로 메이저리거의 반 이상이 이곳 루이빌 슬러거의 배트를 사용한다고 하니, 가치와 유명함은 입증된 곳이라고 본다.
어느 정도 둘러보고 뭘 먹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마땅한 게 딱 떠오르질 않았다. 사실 뭐 먹을지 고민은 여행 전날부터 하고 있긴 했는데, 켄터키에 이렇다 할 음식이 켄터키에서 태어난 KFC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리뷰를 찾아보니 이곳이 제아무리 KFC의 본진이래도 평범한 치킨 프랜차이즈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신 그 인근에서 높은 리뷰와 2800개에 달하는 리뷰 개수를 자랑하는 Royals hot chicken이라는 치킨 레스토랑에 가보기로 했다. 또 한국인이라 하면 'Hot'이라는 단어에 백두산만 한 심장이 뛰고 압록강만 한 혈관이 맥동하지 않는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 맛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매운맛과 후추향의 콤비네이션에 얻어맞아 눈물 콧물 쏙 뺀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곳에서 마땅하게 먹을게 생각나지 않는다면 꽤나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여행의 마지막은 Louisville에서 볼만하다고 하는 Big Four Bridge였다. 이 다리는 원래 1895년에 철도교로 지어졌다가 노선이 운영을 중지하면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90년대부터 시작된 하천개발 사업에 의해 2013년부터는 이 다리를 보행자와 자전거만 다니는 다리로 재활용하기 시작했단다. 본래 이 다리는 Cleveland, Cincinnati, Chicago, St.Louis를 잇던 Big Four Railroad라는 별명의 철도노선이 지나가던 곳이었기에 'Big Four Bridge'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은 Indiana와 Kentuky를 잇는 다리이자 Louisville의 몇 안 되는 관광요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짧았지만 임팩트 있게 하고 싶은 것들만 하고 온 여행이었다. 특히나 미국에서 맛들이기 시작한 버번위스키의 본질에 다가갔던 경험으로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하루 이상 머물면서 볼 것은 없지만, 로드트립 중에 잠깐 들렀다 가거나 근처에서 하루정도 당일치기로 왔다가기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여행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