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서영 스탈대로 going

행복이란?

by beautyshin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삶은 바로

평범하게 보통사람처럼 사는게 제일 힘든게 아닐까?


눈으로 보이는게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가족마다

힘듬이 있고 아픔도 있다.


내 눈에 보이는 다른 가족들은 모두 함께 잘 사는 것이 부럽기만하다.


난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갖게되었다.

연애보다 결혼후 난 너무행복했다.


착한 군인이였던 신랑은 심성이 착하고 성실하고

감수성도 좋았고 그림도 잘그리고 운동도 좋아하는 순수한 사람이였다. 예의바르고 속도깊었지만,

가끔은 철없어보이는 어린남자 아이같은 사람이였다. 그래서 더 사랑했다.


못된 사람들에게 딱 이용 당하기 좋은 사람이였다.

난 결혼후 딱 5개월 행복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어느날 급여가 압류가되고

신랑은 수습한다했지만 하나하나 터지기 시작했다.


결국 시댁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 했지만 도와주시진 않으셨다.

왜 그런건지 알순없지만 퇴직금 담보로 급여압류는 급하게 풀렸고, 생활은 잠시 전쟁중 휴전상태가 되었고, 신랑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행복하게 살고싶었기에 난 조용히 신랑위해 그냥 평소보다 더 많이 챙겼고, 임신7개월 접어들었을땐 사골과 잡뼈를 넣어 고와서 매일매일 새벽에 출근하는 신랑위해 거창하진 않지만 아침을 챙겼다.


친정부모님껜 말할수 없었다.


난 아마도 그때부터 였던거 같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 안스럽기만 했고 내게 미안함에 어쩔줄 몰라하는 신랑은 늘 날걱정했다.

임신전후에오는 '산전 산후 우울증'

난 중간에 온듯 했다. 늘 아파트에서 혼자있었고

"새장속에 갖힌 새"느낌을 갖게되었다.


30년된. 군 아파트는 난방비도 어마어마하게 나왔다 하루종일 틀지도않았는데 보름 틀었다고

660,000만원~~~전기장판과 옷으로 겹쳐서 입고

난방비도 아꼈고 씻을때외엔 틀지 않았다.


군인아파트에 하루종일 태교로 난 책도읽고 신랑이 좋아하던 csi에빠져 보는것이 그게 내 행복이였다.

영어를 뱃속에서 부터 듣고 자라서인지 울아들

영어발음좋다^^.


막달전에 서울로 옮겨. 아이를 낳기로했다.

강원도 양구엔 산부인과가 따로없었다.

병원비와 산후조리비가 걱정이되었지만

시부모님께서 병원비를 내주셨고,산후조리는

친정엄마께서 해주셨다.

아이가 태어났고 부대로 복귀후 3개월간GP로 근무를 하게된 신랑, 전화조차 하기힘들었다.

3개월동안 친정에서 산후조리를하고 친정엄마와 아이를데리고 홍천시댁에들러 양구로 가게되었다.


아이가 9개월쯤?되었을때 당직근무중이라 아빠도 없는데 아이가 열이40도가 넘었다. 내가 할수있었던건 민간요법뿐이였다.

다행히 새벽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불러 응급실에가서 수액을 맞혔다.

의사는 원인일 알수 없다고했다.화가난 신랑은 서울가자!라고말해서 친정집에 와서 동네 소아과에 데려갔다. "수족구"였다.

그때부터 신랑은 고민을했다 서울에서 아이랑 지내는게 어떻게 겠냐고?

친정살이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결국 그때부터 돈 사고는 계속터지게되었고 내가 신랑을대신해 개인회생 신청을 하게되고 결혼예물은 다팔아야했다.


돌잔치가. 끝나고 친정엄마도움으로 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할수 밖에없었다.

한달에 723,000원씩 5년을 값아야했다.


한달에두번 오는 신랑 경비도 아끼려고 월말부부

하기로했다.


신랑이 선배에게 보증서준것이 잘못되어

나모르게 돌려돌려 막기하다 결국 터졌던건데

시댁부모님은 절대 도움주시지 않으셨다.


결국 친정부모님껜 모든걸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 드리고 그때부터 친정살이 시작....

신랑이 밉긴했지만 헤어질수 없었다.

사랑해서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난 가정을 깨고싶지않았다. 힘든거 같이겪는게 부부아니던가?


힘든 시간을 잘보내고 5년이 지나 빛도 다값고

진급도했다.


그리고 딱 5개월 행복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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