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만의 데이트

by 박 혜리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더니 벌써 시월이 지나갔다. 지난달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 게시판에는 A4용지만 한 종이에 인쇄한 글들이 부쩍 늘어났는데 벽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읽어보니 국화축제, 드론 축제, 버스킹 그리고 핼로윈데이까지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었다.


이 주 전쯤, 깊어가는 가을이 아쉬운지 남편은 바람을 쐬러 가자며 어디로 가고 싶은지 내게 물어보았다. 작년에 갔던 곳이 좋았는지 남편은 그곳을 다시 가보자고 말하였는데 한번 다녀온 곳을 텀을 두지 않고 간다는 것이 마뜩잖아 남편에게 나는 한번 알아보겠다 하였다. 코로나가 한창 창궐할 때 앞에 산을 두고도 내리지 못하였다는 친구의 말을 기억한 나는 남편에게 주왕산에 한번 가보자고 말하였는데 지난주 수학여행으로 한라산을 등반한 막내는 집에서 쉬겠다고 하여 이번 가을 단풍 여행은 둘만의 데이트가 되었다. 떠날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치 소풍날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나는 들떴는데 마실 물과 함께 껍질 벗긴 과일을 통에 담아 챙겨 넣고 우리는 주위가 어둑한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다.


고속도로는 단풍철이라 그런지 나들이객들의 차량으로 평소 주말보다 많이 붐볐다. 목적지의 반 가까이 왔을 무렵에 도로가 조금 막히긴 하였지만 차가 정체되지 않고 서서히 빠져 아침이 늦지 않게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음식을 주문하고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바탕 주위가 왁자지껄하여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뒤돌아보니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큰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휴게소 안으로 들어왔다.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자 우리는 얼른 식사를 하고 따뜻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여 차에서 마시고 나서 목적지를 향하여 달렸다.



굽이굽이 모퉁이 돌 듯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에 내려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니 작은 평지가 나타났다. 오늘 우리가 가볼 곳은 경상북도 청송에 있는 주왕산 국립공원인데 나무가 연못에 서 있다는 주산지 가는 길은 차들이 진입로부터 뒤엉켜 드문드문 주차한 차들이 보이는 새로 지은 주차장에 남편은 주차를 하였다. 차에서 내려 다리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호 하고 맑은 공기 속에 입김이라도 불면 서리라도 내릴 듯 청명한 날씨인데 새파란 하늘에는 흰구름 떼가 새의 발자국 같은 수를 놓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절골계곡의 단풍을 보기 위하여 다시 발걸음을 옮겼는데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일 킬로미터정도 걷다 보니 저 멀리 탐방로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입구에는 몇 사람이 서 있었는데 안내원에게 들어가도 되냐고 물으니 그녀는 단풍시즌이라 예약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며칠 전부터 어디로 가면 더 좋을지 검색은 하였지만 예약을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였는데 오전인 데다 입장객이 많지 않아서인지 안내원은 그냥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탕방로는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의 너비였다. 남편과 나는 앞뒤로 나란히 걸으며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넓게 펼쳐진 계곡과 곱게 물든 단풍 든 산들을 바라보며 아름답다 마음속 탄성을 질렀는데 위로 거슬러 올라가니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중간중간에 나왔다. 바위 위 응달진 곳에 돗자리를 펴놓고 웅덩이에 몸을 담그면 신선놀음이 되겠다는 상상을 잠시 해 보았는데 졸졸 물소리를 내는 얕은 계곡사이를 지날 때 내 앞에 걸어가던 남편이 손을 잡아 주어 나는 조심해서 건널 수 있었다. 계곡 사이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니 이쪽저쪽 계곡을 이은 다리가 나타났는데 계곡의 난간에 기대서서 사진을 찍으며 반대편 단풍이 우거진 산을 다시 바라보니 구름다리 위에서 노는 선녀가 된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가메봉이 시작되는 계곡의 끝에 이르렀는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길이 멀다는 생각에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계곡을 다시 내려왔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걸어와 점심을 먹기 위하여 우리는 식당을 찾았다. 처음 와 본 지역인 데다 맛집 검색만 마냥 할 수 없어 이차선 도로 중앙에서 길 안내하시는 분에게 먹을만한 식당이 근처에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마을 쪽으로 내려가면 여러 채의 식당이 있는 거리가 나온다며 알려 주어 온 길을 되짚어 우리는 다시 산을 넘었다. 그가 알려준 대로 와서 보니 빈자리가 드문 넓은 주차장이 나왔는데 빈자리를 찾아 간신히 주차를 하고 나서 외관이 깔끔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등산복 차림의 등산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부부와 함께 아니면 친구 또는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정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우리는 나물이 많은 더덕구이정식을 먹었는데 음식점을 지나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큰절이 나오는 대원사와 용추계곡의 바위산은 날씨가 좋은 날 다시 찾기로 하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사위사랑은 장모님이란 말처럼 첫째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엄마는 남편을 위하여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았다. 현관 앞마당에 있는 가마솥에는 알몸을 드러낸 닭이 털이 뽑힌 채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었는데 엄마는 남편을 시켜 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라고 말씀하였다. 남편은 시키는 대로 하였지만 시간이 나 솥뚜껑을 열어 본 엄마는 혀를 끌끌 찼는데 닭이 헤엄을 치고 다녀도 될 만큼 남편이 물을 많이 부어 엄마는 물을 다시 들어내고 백숙을 끓여야 했다.


장가를 드는 날까지 막내인 남편에게 시부모님이 집안일을 시키지 않아 남편 손을 빌리려면 나는 처음부터 일을 가르쳐야 했다. 용기만 백백하여 아무 문제없다는 말만 믿고 몸이 마른 남편에게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한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의견차이로 젊은 날엔 티격태격하기도 하였지만 아이의 아빠로 든든한 존재가 되어준 남편은 내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사랑의 기술"을 쓴 에리히프롬은 사랑은 감정보다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랑을 그림에 비유하며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배우지 않고 그릴 대상만을 찾는다고 비판하였는데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측은지심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는 이제야 온전히 한 몸 된 부부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시월은 가까운 곳에 나들이하며 화창한 날씨 속에 맛있는 것을 먹으며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학업으로 바쁜 아이들 때문에 가끔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요즈음 젊은 시절의 열정은 지났지만 함께 걸어갈 노년의 시간이 기대되는 나는 앞으로도 건강하게 두 손 꼭 잡고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보았다.


결혼에 대하여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오히려 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고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력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각자는 고독하라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만들되

줄은 각자 따로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지니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는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으니


-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