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전화를 받고 아파트 후문 앞으로 나가자 그녀는 저 멀리서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옅은 카키색 V넥 티셔츠와 짙은 청색 청바지를 입은 친구는 언제나처럼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더위가 몰려오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만나기로 약속한 우리는 양옆으로 메타세쿼이어 나무가 연초록 물기를 머금고 바람에 하늘거리는 가로수길을 지나 저녁을 먹기 위하여 음식점으로 향하였고 하늘이 보이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는 그날 자전거를 타고 왔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한다며 여름과 추운 겨울을 피하여 자전거를 이용하면 운동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친구는 한가롭게 차를 마시고 여행을 다니는 내가 부럽다고 하였는데 가족모두 건강하고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며 열심히 사는 네가 보기 좋다고 나는 말해 주었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 우리는 한겨울에 맨손으로 빨래를 하여 손등이 빨갛게 부르튼 내 손을 친구가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시작되었다. 직선으로 자른 단발머리가 어울렸던 친구는 클레오파트라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머리색이 검고 예뻤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쩍 말수가 줄어든 나는 친구와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은 채 졸업을 하였다. 혼자 떨어져 외로웠던 나는 그 따뜻한 온기의 기억으로 후에 친구에게 편지를 하였지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다 내가 동생과 함께 살기 위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같은 도시에 살게 되었다. 간이열차에 몸을 실은 여행객이 되지 못한 채 바빴던 우리는 가까이 살면서도 자주 만나지 못하였는데 친한 친구가 짝사랑하던 그녀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오면서 다시 재회하였다. 친구의 결혼식 날, 베이지색 주름스커트에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은 나는 환한 웃음으로 축하해 주었는데 직장을 다니고 육아를 하느라 서로 소식이 뜸했고 다시 만남을 잇게 된 건 동창회가 결성되면서 주소록에서 내가 그녀의 이름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교회 공동체외에 곁을 좀처럼 주지 않는 친구는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 내 전화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금 사회복지사로 활동 중인 친구는 나와 연락이 닿을 무렵에는 어린이집 교사로 근무 중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 잠깐 쉰 시간 말고는 줄곧 직장생활을 하였다는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직장을 다니면서 마저 공부를 하였고 일어를 전공하여 한때 번역일을 하였다.
식사를 하고 나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눌 때면 가끔 친구는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럴 때면 조용하던 목소리가 활기를 띠었는데 가냘픈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는 학창 시절 오토바이를 타며 논밭을 누볐고 내부가 궁금하여 밥솥 몇 개를 망가뜨렸으며 컴퓨터를 해체하여 조립하였다고 하였다. 오래전 직장을 다닐 때 압축파일을 풀지 못하여 헤맬 때 친구에게 전화를 하면 자세하게 알려준 것은 그 때문 아닐까 짐작이 되는데 그늘이 없는 친구는 아이가 어렸을 때 말을 듣지 않으면 화를 참기 어려웠다고 아버지에게 맞고 자라서 그런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가족이 화목한 데에는 오랜 세월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보며 기도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젠가 친구의 자취방을 갔을 때 냉장고 안에 반찬이 가득 채워진 플라스틱통이 가지런한 것을 보며 나도 반찬을 해주는 엄마가 있었으면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친구와 나는 일 년에 서너 번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한때 가까운 친구란 거짓 없이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생각하며 알게 모르게 스며든 친구가 상황이 바뀌었을 때 내 말을 퍼트렸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고독과 절친되어 고독을 모르고 살았다. 죽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도 모른 체 지나갈 날이 오고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 통 없을 만큼 멀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처럼 어린 시절 5 총사라고 불리며 아침과 점심때에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학교 가자 우렁차게 부르던 친구들은 학교가 달라지고 삶의 곡절을 겪으면서 지금은 간간이 뜬소문으로나마 소식을 들을 뿐인데 남편 때문에 속상하다고 전화하던 친구는 이제 제자리를 찾은 것인지 잠잠하고 아들이 명문대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친구는 동서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몇 시간을 말하였다. 사람 사는 모습이 비슷한 것 같아 그날 나는 혼자 피식 웃었는데 한 사람을 아는 것보다 열사람을 알게 된다면 그 히스토리로 인하여 삶이 풍부해진다는 말을 나는 이제 믿는다.
기러기는 먹이와 따뜻한 곳을 찾아 40000km의 긴 비행을 하면서 리더를 중심으로 V자를 그리며 날개를 펼쳐 동료의 비행을 돕고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대열을 이탈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동료가 있으면 기다려주고 함께 모여 다시 비행한다고 하였다. 나이와 경제력, 지위를 초월해야 친구가 된다는 신부님의 가르침처럼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걸려 온 지인의 전화로 친구가 되었는데 기나긴 인생길에 등을 기댈 수 있는 친구가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다.
비가 자주 와 햇살이 그리운 요즘, 장마가 지나가면 점심을 함께 하자고 나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