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 춘수 "꽃"
해 질 녘의 마을은 노을빛으로 물들고
친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운동장은 땅거미가 앉기 시작한다.
일찍 집에 가기 싫은 나는 도서관에 주저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그날은 소공녀의 주인공 세라가 우여곡절 끝에 부친의 동업자를 만나 다시 공주의 자리를 되찾는 것으로 엔딩 된다.
나는 마치 세라가 된 것처럼 예쁜 드레스를 입고 다시 찾은 명예로 행복해했다.
데미안을 읽으며 자아를 발견했고 제인 에어를 통해 제인과 백작이 나누는 폭풍 같은 사랑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오싱을 읽으며 주인공의 나라 일본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
중학생이 되어 중간고사 보는 날에 도서관에 숨어들어 책을 읽다 담임 선생님께 발각된 나는 시험 보는 날 책 읽는다고 혼이 났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강렬했고 난 점점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다.
책은 나에게
부모님의 전쟁으로 위로가 필요할 때 살며시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원망 대신 이해하며 애도할 수 있었고 엄마의 채워지지 않은 바람들을 용서했다.
내 노력들이 상처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아량이 있었고
몸이 아플 때에도 넘어지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잘못했을 땐 죽비를 들었고
넘어질 때 용기를 잃지 말라 했다.
울고 싶을 때 값싼 눈물 보이지마라 하고
울어야 할 때에는 보석 같은 눈물 흘리라 했다.
무엇보다 나를 먼저 사랑하라 가르쳤다.
가끔은 스스로 잘났다고 자랑질하는 짝지를 두고
내게 병법을 전하는 책사가 되기도 한다.
오랜 친구와 결별할 때
참이 무언지 알게 했고
누구보다 내게 친절하고 정직했다.
책은 그렇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에필로그
월든 호숫가 옆 팔베개를 하고 누운 나에게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윙크를 보내는데 내 옆엔 한 권의 책이 바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눈은 점점 침침해지는데 손짓하는 너의 몸짓이 사랑스러워 너와 함께 오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어깨동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