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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Jan 21. 2022

7. 어머님은 뭘 하실 때 가장 행복하세요?(1)

살면서 받은 질문 중 가장 깊이 있는 질문이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엇을 할 때 행복하세요?'라는 내 감정에 대한 질문보다 '무엇이 되고 싶니?' 와 같은 내 미래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이던 준비되지 못한 부족한 엄마로 살며 그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오랜 시간들 중 아니 내 인생의 모든 시간을 통틀어 '~ 행복하세요?' 나의 감정을 묻는 최초의 질문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슬픈 게 아니던가. 누군가 나에게 단 한 번도 '너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니?'라는 질문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어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생각해 본 시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

 인간은 인생을 살아가며 다양한 형태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게 물질적 행복이던, 마음의 평안이던, 가족의 안녕이던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함인데 그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삶이라니. 얼마나 모순 같은 시간인가.


 내 생애 최초의 질문을 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아이의 심리 상담을 해주시던 선생님이었고, 하필 그 질문을 받았을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하고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때였다.

 태생적으로 소리에 예민하고 호기심이 많은 나의 어린 시절 그대로를 쏙 빼닮은 나의 큰 아이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아주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아니 나의 기질을 그대로 빼닮은 것을 떠나 내가 기억하는 범위에서는 적어도 사랑받은 기억이 없는 나였기에 내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해 줄줄도 모르는 부족한 엄마에게서 자란 나의 큰 아이는 심리적으로 아주 큰 불안감을 끌어안고 자라왔다. 그것이 부디 내 탓이 아니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엄마인 나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자랐다. 무뚝뚝한 말투와 감정 없는 표현, 사랑하지만 사랑한다 말할 줄 모르고 그저 잘못된 것만 지적하는 무서운 엄마에게서 자란 나의 아이. 말이 더뎠고 그래서 모든 자기 의사 표현을 몸으로 밖에 할 줄 몰랐던 여섯 살의 아이는 늘 나에게 걱정거리였다.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할 나이건만 또래 아이들보다 뒤늦게 터진 언어에 친구들과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친구 관계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누구보다 답답했을 자신에게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는 엄마는 당연히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 12시간 일을 하고 돌아오면 큰 아이는 보통 아빠와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있거나 깨어있다 해도 내가 아이를 보듬어 줄 체력이 모두 바닥이 난 상황에 내 아이를 보듬어 주는 것조차 해주지 못한 어리고 어리석었던 엄마.

 나는 사실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고 느꼈다. 알고 있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온갖 육아 서적을 읽고 검색을 해가면서 아이에게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아이의 불안을 사그라들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 하나 지탱하는 것도 버거워 아이만 다그치던 못난 엄마에 불과했다. 내가 그렇게 자랐으면서,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누군가의 동정을 받고, 기억하는 모든 유년이 행복하지 못했던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왜 내 아이를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이해해 주지 못했을까.

 나의 큰 아이는 불안한 그 상태 그대로 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더 큰 세상으로 나온 아이는 단 한순간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수업 시간에도 가만히 앉아있질 못했고, 다른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혼자 교실을 휘젓고 돌아다닌다거나 아예 교실 밖으로 나가기도 했으며 협동을 필요로 하는 시간엔 친구들과 조금만 의견이 틀어져도 무리에서 불쑥 빠져나와 혼자 있기를 자청했다. 아이가 입학을 하던 해에 터진 코로나로 학교에 적응하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서, 학교에 정을 붙일 시간이 없어서였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 그것도 이유라면 이유였겠지.

 아이가 처음 입학했던 학교에선 아이의 행동을 한 달 정도 지켜보곤 아예 아이를 방치해버렸다. 처음 아이의 문제 행동을 인지한 것은 입학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학교 앞으로 아이를 데리러 간 내게 담임선생님이 다가와 "수업 시간에 가만히 앉아있질 못해요. 다른 친구들 수업도 방해하고요." 하고 말을 건네면서부터였다. 어린이집에 있을 때와 같은 행동이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미술치료 상담 센터를 꾸준히 다니고 있었지만 아이는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그것이 아이의 탓인 줄만 알았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너를 상담 센터에 데려가며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데 어째서 너는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울고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고, 그것은 애초에 나로부터 시작된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 내 탓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가정학습이 늘어나면서 1학기 동안 채 두 달도 학교를 나가지 못했었다. 가정 보육이 늘어갈수록 아이는 학교 가는 날이 다가올 때마다 더더욱 불안해졌다. 산만한 행동, 정리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듯 핵심이 없는 말들과 간단한 문제에도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빙빙 돌아가는 시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학교 wee 상담 센터 연결을 신청했고, 그 해 10월 외부 상담 선생님과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 한  주는 아이만, 한 주는 나와의 1:1 대면 상담, 그렇게 매주 번갈아가며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약 한 달 동안 총 4번의 상담이 이루어진 후 선생님은 아주 뜻밖의, 아니 이미 알고 있었으나 애써 외면했던 문제들을 내 앞에 거침없이 쏟아내셨다.


 "어머님. 윤호는 전혀 문제 있는 아이가 아니에요. 또래 아이들보다 이해가 조금 부족한 것은 맞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실 수준이 아니고 책만 꾸준히 읽는다면 해결될 문제예요. 그보다 시급한 건.. 윤호는 엄마를 너무 사랑하는데 엄마는 자길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고 말을 해요."

 

 울 염치가 어디 있겠는가,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큰 아이보다 어린 동생에게 더 눈길을 주고 조금 더 크면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겠지 하며 어리석은 생각만 했던 내 잘못인 것을. 결코 엄마는 너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엄마는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고 얘기해 주지 않았던 나의 잘못인 것을.


 "어머님. 윤호는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어머님을 너무 사랑하고, 어머님을 더 기다려 줄 수 있는 아이예요. 어쩌면 어른인 저희보다 더 참을성이 많은 아이예요. 엄마가 자길 바라봐 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윤호는."


 나였다. 어린 시절의 나였다. 눈길 한 번, 따뜻한 품 한 번을 그리워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그대로 내 아이에게 투영되고 있었다. 받아본 적이 없어서 해줄 줄 모른다는 것은 단지 내 핑계에 불과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을, 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계속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난 이렇게 30년을 살아왔어. 난 못 해.'

 아니, 할 수 있는 거였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야멸찬 시선을 받고도 지금껏 인생을 살아왔던 힘으로 내 아이는 나처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지켜줬어야 할 일들이었다.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만들어지지 않지만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는 그간 살아온 나의 모든 방식을 바꿔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인간이다. 나는 그것을 아이를 낳고 기른 지 8년이 넘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선생님?"

 "윤호 얘길 들어주세요. 윤호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윤호가 누군가와 싸웠다고 할 때에는 먼저 윤호의 입장을 들어주세요. 윤호도 친구를 때리는 게 잘못된 것인지 알고 있어요. 다만 왜 그 친구와 싸우게 됐는지 단 한 번도 변명을 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그저 엄마한테 그 친구를 때린 것에 대해 혼난 것만 기억을 해요. 엄마는.. 자기 말을 들어준 적이 없다고 해요."


 들어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왜 그랬냐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때리고 왔다는 행위 자체에만 꽂혀 아이를 다그치고 혼내기 바빴다. 혼을 내서라도 아이의 폭력성을 잠재워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의 폭력성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 되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나도 맞았는데, 그 친구가 먼저 놀렸는데 등의 많은 이유를 나는 단 한 번도 들어주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작은 나의 아이는 엄마에게..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님. 윤호는 엄마가 자기 얘길 들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릴 수 있다고.. 윤호가 저한테 그랬어요. 선생님이 엄마한테 말씀드려 볼게,라고 얘기하니까 자긴 기다릴 수 있대요. 엄마는 자기 얘기 들어줄 거라고.. 그러네요."


 도대체 누가 누굴 기다리는 걸까. 보통은 내가, 엄마인 내가 기다려야 하는 일 아닌가? 그런데 내 아이가 나를 기다려주겠다고 한다.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너는.. 계속 나를 기다렸겠구나. 내가 들어주길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염치도 없이 한참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부족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생각 짧은 엄마의 후회였다.

 가끔 두어 달에 한 번씩 동생을 친정에 맡겨두고 큰 아이와 영화를 보고 카페에 다녀오곤 했었다. 내 딴에는 그저 동생에게서 받을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는데 큰 아이는 그날들을 선생님에게 "엄마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나를 독차지하는 날, 오롯이 자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는 날. 설령 내가 자신의 얘기를 들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고 한들 그런 순간마저 나와의 시간이 행복했다는 나의 큰 아이. 엄마보다 더 깊게 생각하고 있는 여덟 살의 나의 아이.


 "할게요. 할 수 있어요. 앞으론 들어줄게요."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게 아주 짧은 다짐이었지만 나는 아이의 얘기를 계속해서 들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게임 얘기여도, 만화 속 주인공 얘기여도, 공룡 얘기에도 그저 끄덕여주고 들어주었다. 그리고 함께 하루 한 권씩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갔다. 아주 버라이어티하게, 단 시간 내에 바뀌진 않았지만 아이는 서서히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상담 선생님과 3개월여의 상담을 하며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께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는 아이를 통제할 만한 방법 몇 가지(자리에 앉아서 그림 그리기, 퍼즐 하기)를 제안하였지만  담임선생님은 그저 아이를 타일러 자리에 앉게 해야지 다른 요소를 덧붙이면 안 된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이미 작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힌 나의 아이는 학교에서 모든 행동을 통제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에서 가장 상처가 될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아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아이와 내 앞에서, 딴에는 웃자고 한 농담 같은 식의 말투였고 그동안 천천히 변해온 나와 내 아이의 노력에는 아랑곳없이 이야기하는 담임을 보며 화가 났지만 꾹 참고 학교를 나와 집으로 걸었다. 내 앞을 앞서 걷던 큰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마치 내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점점 더 속력을 내며 빠른 걸음으로 훌쩍거리며 앞서 걸었다. 나는 그 소리에 덩달아 빠른 걸음을 걸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윤호야, 왜 울어? 속상한 거 있어?"

 

 대답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나란히 걸었다. 그러자 몇 발자국을 떼던 아이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


 "선생님 얘기.. 속상해서.."


 자신 때문에 힘들었다는 선생님의 말이 아이에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혀들었던 것이다. 나도 하는 수없는 엄마라 듣기 너무 거북했던 그 말이 아이에겐 더더욱 날카로운 칼날처럼 파고들었고 집으로 가는 내내 아이는 펑펑 울었다. 나란히 걷던 나도.

 상담을 하는 3개월 내내 아이의 변화를 바라면서도 상담 선생님과 내가 제안한 그 어떤 방법도 수용해 줄 수 없으며, 아이를 의자에 묶어 앉혀서라도 가만히 앉아있는 법을 가르치라던 학교 측의 태도에 나는 하는 수없이 전학을 결심했다. 담임 혼자만의 의견이 아닌 학교 측의 의견이었다.


 2021년 2월, 나는 전학 신청서를 쓰고 다니던 학교에 찾아가 아이의 물건을 모조리 빼왔다. 신학기를 준비하고 있는 그 교실에 그 담임 그대로였다. 어쩐 일이시냐며 묻는 담임의 물음에,


 "차마 제 아이를 의자에 묶지는 못하겠기에 전학 가려고 합니다. 선생님, 혹여나 제 아이와 같은 아이가 입학을 한 대도 의자에 묶어두란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랑 제 아인 선생님이 농담처럼 너 때문에 힘들다고 했던 그날, 길거리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지켜오신 교육적 신념에 혹시 실례가 될까 늘 정중하게 부탁드렸습니다. 그 부탁에 돌아온 대답이 의자에 묶어두란 말씀이셨고요. 그래서 전학 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내 아인 작년 3월 2일, 전학 간 학교에서 너무도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 적응을 하던 기간 동안 아이들 간의 기싸움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내 아이는 교내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같은 반 학부모님들의 도움으로 아주 달라진 모습으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며 이제 3학년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며 동생이 어린이집에 가고 나와 둘만 남은 집에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서로 핸드폰 게임을 하며, 책을 읽으며, 수학 공부를 하며 잘 지내고 있다.

 30년을 무뚝뚝하게 살아와서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말은 이제 남의 일처럼, 궁둥이 팡팡 두드려주며 조금씩 표현하는 중이다. 아직 한참이나 더 표현해야 할 마음이지만 나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마음을 꺼내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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