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닮다 Jan 17. 2022

6. 피노키오, 음흉한 아이(2)

그 맘 때의 아이들이 그렇듯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쯤 우리 또래의 나이인 가수 '보아'가 13살의 나이로 데뷔를 했을 때는 가수가 되고 싶었고 교내, 교외 행사 가릴 것 없이 글짓기 대회가 있을  때면 나부터 불러내는 선생님들의 푸시 덕에 작가를 꿈꾸기도 했으며, 아빠가 되고 싶었다던 건축 디자이너를 꿈꿔보기도 했었다. 하고 싶은 것이 그렇게나 많았던 내가 실제로 실천에 옮겼던 가장 첫 번째는 가수의 꿈이었다.

 어릴 적, 삼촌들이 즐겨보던 가요 프로그램에서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나와 춤을 추던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따라 추며 재롱을 부릴 때마다 삼촌들은 "우리 미, 가수 시켜야겠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었고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듯, 삼촌들의 말이 내게 첫 꿈이 되었었다.

 당시 KBS 강원 방송에선 매주 금요일마다 어린이 동요제가 방송됐었고 항상 그 프로그램을 챙겨보던 나는 아빠와 그녀를 졸라 그 동요제 심사를 보러 가게 되었다.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라며 칭찬에 더 익숙했던 내게 처음으로 시련을 가져다준 예선이자 비수 같은 한 마디를 듣게 된 일이었다.

 노래방 기계처럼 반주가 흘러나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피아노 건반에 맞추어 시작된 예선에 나는 도입부도 제대로 찾지 못했고, 결국 입 한 번 제대로 벙긋해보지 못한 채 예선에서 떨어졌다. 무더웠던 여름, 손녀가 방송국 동요제 예선을 보러 간다는 말에 푸른색 꽃무늬 원피스까지 사 입혔던 할머니의 기대에 턱도 없었던 예선이었다. 물론 어린 마음에 입도 벙긋해보지 못하고 떨어진 것에 상심이 컸겠지만 나를 더 아프게 했던 건 그녀였다.


 "거 봐, 내가 뭐랬어.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어머, 나 못 살아."


 당신의 친딸에게도 그렇게 얘기했을까. 그렇지 않아도 속상했던 차에 그녀는 아주 대놓고 좋아 죽겠다는 듯, 핀잔을 늘어놓았다. 방송국에서 나오는 내내,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녀의 핀잔은 그칠 줄을 몰랐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에게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쳐 어쩌냐는 듯,


"자기야, 미 짹 소리 한 번도 못 내보고 떨어졌어. 하하. 다른 애들 다 잘만 부르는데 쟤만 짹 소리 한 번 못했다니까?  아주 내가 다 쪽팔려서 죽을 뻔했네. 옷은 제일 화려한 거 입고  가서 어떻게 입도 못 떼보고 떨어져?"


 그녀의 말에 아빠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아빠도 그 말에 나를 한심하게, 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내 기를 팍팍 죽이는 그녀의 말을 단 한 번도 말려준 적이 없었던 아빠다. 지금에  와서라도 그 이유를 묻고 싶지만, 아빠는 분명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기억이 난다고 해도 이제 와 내게 변명을 한들 달라질 것도 없다. 할머니와 삼촌들이 한껏 치켜세워 주었던 내 자존감은 이미 다 깎여나간 지 오래이니까.

 

 교동으로 이사를 한 후, 겨우 초등학교 2-3학년인 날 동갑내기인 아랫집 남자아이와 둘만 남겨두고 그 집 부모들과 술을 마시러 다니는 게 아빠와 그녀의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아랫집 남자아이와 부쩍 가까워졌다. 온통 숲에 둘러싸인 우리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야 조금이라도 덜 어둑한 그 친구네 집에 있는 게 백 번 나았고 팩 게임을 하고 놀거나 그림을 그리고 놀다 깜빡 잠이 들면 나를 들쳐업고 집으로 향했던 술 취한 아빠와 그녀. 나는 그렇게 5학년 때까지 방치되었다. 더군다나 술만 마시고 들어왔다 하면 싸우기 일쑤였고, 걸핏하면 집을 나가겠다는 그녀와 아빠의 육탄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중학생 정도만 한 키에 초등학교 5학년인 나와 체구가 비슷했기에 아빠와의 몸싸움에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치사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었고 싸움이 늘어갈수록 내가 그녀를 감싸 안고 그녀를 대신해 아빠에게 맞는 일이 허다해졌다. 그래도 내겐 처음 가져보는 엄마였고, 나보다 약하디 약한 그녀를 아빠에게서 보호해 줄 방패 막은 오로지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니 그녀가 9년 전 이 집을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술에 취한 아빠의 탓인 줄만 알았다. 사춘기로 접어들수록 아빠에 대한 내 적대감은 극에 달했고, 그럴수록 내 방황은 점점 선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1999년, IMF가 터진 지 2년이 넘어서던 그즈음까지도 아빠는 꾸역꾸역 어떻게 해서든 일을 따내 월급을 받아왔지만 그마저도 월급의 반의 반절밖에 되지 않는 때가 더 많았고, 당시 2만 몇 천 원의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달이 허다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 나의 담임은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급식비를 내지 못한 친구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렀고 거기엔 나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것이 아이들의 잘못은 아닐 텐데 그 선생은 굳이 나를 포함한 4명의 아이들을 불러내 손바닥을 때리기 일쑤였고 그럴수록 내 반항심은 점점 더 극에 달했다. 그때 그 선생의 낯짝과 이름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두 사람의 싸움과 급식비조차 내지 못하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을 버티고 버티던  나는 5학년 2학기 말 11월쯤 결국 할머니의 집으로 다시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옥천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어린 내가 아빠로부터 맞고 있는 그녀를 보호하기엔 너무 버거웠다. 엄마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첫날을 제외하곤 그 집에서 나는 단 하루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방치되었고, 무기력해졌으며 나는 생각보다 보잘것없는 아이라는 것만 일깨우게 되었고 가정폭력이란 개념도 없던 시대에 우리 집은 그 표본인 것만 같았다.

 

 내가 할머니 집으로 다시 돌아간 후, 그녀와 아빠는 뜬금없이 강릉시 연곡면으로 이사를 갔다. 나를 낳고 난 후  쭉 막노동만 해오던 아빠가 양계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밭 일구기, 가축 키우기 등을 놀이 삼아 해오던 아빠였으니 양계장 사업은 초반 아주 대성하는 듯했다. 매주 주말 내가 연곡에 놀러 가는 날이면 아빠와 함께 연곡 초등학교 옆쪽 넓은 대지에 지어진 아빠의 닭장 5동을 이리저리 구경하러 다니곤 했다. 현재는 그때의 넓은 대지 대신 큰 컨테이너들이 들어서 있고 인도가 쭉 깔려있지만 당시에는 인도조차 없어서 집에서부터 연곡 초등학교까지 도로 끝 하얀 실선 바깥쪽으로 벗어나 걸어가야 했다.

 항상 따뜻한 온도를 유지해 주어야 했던 닭장 내부는 한여름에는 푹푹 찌는 듯했고, 겨울엔 외부의 낮은 기온과 대비되어 아주 따뜻했다. 가끔 늦은 시간 아빠와 함께 모이를 주러 가보면 항문 쪽에서 피가 나는 병아리들이 있었는데 그럼 같은 종의 병아리들은 그것을 물로 인식한 듯 피가 나는 병아리에게로 몰려들어 항문 쪽을 마구 쪼아 대어 결국 내장이 모조리 파 먹힌 채 죽어있는 병아리들도 심심치 않게 생기곤 했다. 아빠는 그것이 모두 물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5개 동에 하루 한 마리씩은 그런 식으로 죽어있는 병아리들이 있었다.

 비록 사춘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하나 매일 보았던 전쟁 같은 싸움과 멀어지고 난 후, 나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고 더 이상 나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 줄어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땐 반장으로,  합창단 단원으로, 교내 방송부의 아나운서로 여기저기서 내 끼를 분출하고 있었다. 막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순전히 세일러 하복이 예뻐서 친한 친구들과 함께 1 지망에 넣었던 관동중학교에 나만 배정받게 되면서 나의 지옥은 다시 서막을 올렸다. 그녀의 딸, 나와 동갑내기인 그 아이가 연곡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고 나와 같은 중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나의 모든 학창 시절은 꼬여버렸다.

 성 씨도 다르고 생김새도, 덩치도 완전히 다른 데다가 심지어 동갑인 얘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기까지 하니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흔하지 않았던, 아니 드러내 놓을 수 없었던 재혼가정의 아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싶지 않아 사촌이라고도 했다가 그냥 아는 사이라고도 했다가 결국 나중엔 하는 수없이 친한 친구들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당연히 완벽한 비밀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모든 이가 알게 된 그 애와 나의 사이. 특별히 친해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남 같지도 않은 그 애와 나 사이를 친구들은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렇고 그런 평범한 일상을 지내던 그때, 뜻밖의 얘기를 꺼낸 것은 할머니였다.


 "이제 승희도 왔는데 너도 연곡 들어가서 지내. 그래야 애미랑 승희랑 정도 붙지. 애미애비가 없는 것도 아닌데 계속 할미 집에 와서 살 수는 없으니 이젠 애미랑 더 정 붙게 연곡 들어가서 다녀."


 또다시 그 지옥 같은 싸움을 하는 집구석에 들어가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이미 2-3년 전의 일이고, 그 애도 왔으니 예전만큼 싸우지는 않겠지라는 할머니의 말에 묘하게 설득당한 나는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에 연곡으로 들어가 그 애와 그 여자, 그리고 아빠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살면 살수록 나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동생이었지만 동갑내기 말동무가 있다는 것은 그럭저럭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다만, 그녀와 아빠의 술 친구들은 그곳에서도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우리는 또다시 그 집에 방치되곤 했다. 그래도 전보다는 괜찮았다. 10살일 때보다야 무서움도 덜 해졌고 동생도 있으니까.

 중학교 2학년 개학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양계 사업을 넓히려고 더 넓은 땅을 사들였던 아빠가 땅 사기를 당하게 되고 우리는 갑자기 멀지도 않은 과거로 돌아간 듯, 한 달 치 급식비도 내지 못하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그전에도 넉넉하게 산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갈 정도가 되리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참 우스운 건 어느 날부터 내 급식비는 할머니가, 그 애의 급식비는 아빠가 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려워진 형편에 할머니께 도움을 청해 나눠낼 순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째서 그 애의 몫만이었을까. 우리 아빠는 나의 아빠가 아닌가? 모든 게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던 와중 2학년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이 시작되며 점점 그 애와 나에 대한 비교가 시작되었다. 국어, 영어 문과 쪽에 성적이 높았던 것에 비해 형편없는 수학 점수로 높았던 평균 점수를 홀랑 다 까먹은 나에 비해 그 애는 문과 쪽도 고만고만, 이과 과목도 고만고만한 성적으로 나보다 평균 점수가 몇 점 더 앞섰고 그것을 빌미로 다시 비교가 시작되었다. 늘 그 애는 나보다 몇 등 더 앞서 있었다. 당시 고교 평준화가 되지 않았던 강릉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모여있다는 강릉여고, 그리고 그 뒤이어 강일여고, 경포고 등으로 성적순에 의한 고등학교 배정이 이루어졌는데 그 애나 나나 둘 다 강일여고를 갈 정도의 성적으로 비슷했지만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그 애를 보며 아빠는 나에게 한숨을, 그녀는 나에게 웃음을 지었다.

 순하고 붙임성 좋은 그 애와 이기적인 나를 비교하자면 당연히 그 애에게 친구들도 훨씬 많았다. 정을 붙이자고 함께하게 된 생활의 말로는 끝끝내 어른들의 비교와 그녀의 가시 같은 말 한마디 한마디로 인해 또다시 1년을 채 버티지 못한 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그 애와 내 사이도 서서히 더 멀어졌다.


 그 애와 내 성적이 나올 때마다 "미는 그냥 가수 하게 둘걸 그랬다."라며 비웃던 그녀의 모습과 독서실에 가게 오천 원만 달라고 할 때면 따라오던 그 비아냥들이 가슴에 칼날같이 꽂혀 들어왔고 당시 사천 해변 근처에서 카페를 하던 막내 삼촌 가게에서 내가 주말 일을 돕고 있던 사이 그 애에게만 좋은 신발과 옷, 당시 한참 유행하던 슬라이드 핸드폰을 선물했던 나의 부모의 모습에서 나는 철저히 그곳에서 배제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 그 여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우리 아빠는? 우리 아빠마저 나를 못난 아이로, 동생을 이길 수 없는 자식으로 생각했던 걸까.

 나의 일탈은 우연치 않게 3학년 언니들의 권유로 입에 물게 되었던 담배로부터 시작되었고, 당시 실제로 피워보지도 않았던 담배였건만 내게서 담배 냄새가 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에 부모님을 소환했던 때부터였다. 한 살 위의 선배들이 가장 무서웠던 나이, 그 언니들의 강요로 한 번 입에 물어보자마자 콜록거렸던 내 입에서 나던 그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나를 영원히 낙인찍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철저히 문제아로 찍혀버렸고, 얌전한 얼굴을 한 엉큼한 아이가 되었다.

 그래,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완벽한 문제아가 되어주겠어. 당신이 바라는 대로.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되어주기로 한다.

이전 05화 5. 피노키오, 음흉한 아이(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