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이가 나아지는 동안에도 나의 상태는 계속해서 제자리에 맴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의 학교생활과 태도를 고치는 데에 너무 많은 힘을 들여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3개월 동안 아이만의 문제로 상담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태도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양육태도에 더 많은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상담 선생님의 입장에선 나와 내 남편의 양육태도 혹은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나의 유년, 나의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대했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상담이 길어질수록 아이의 태도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지만 나의 상담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내 아이를 마치 제3자의 입장으로 들여다보는 말투와 내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제대로 꺼내지 않았던 것.
"어머님, 어머님께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랑 상담하시는 3개월 동안 윤호 얘기 외에는 단 한 번도 저랑 눈을 맞추지 않으셨어요. 특히 어머님의 어릴 적 얘기나 어머님이 현재 하고 계시는 생각에 대해 여쭤보면 저랑 눈을 맞추지 않고 말씀을 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선생님의 말투는 시종일관 따뜻하고 조근조근한 말투였다. 내게 누군가가 그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무엇을 물어봐 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분위기가 너무 생경하고 낯설었다. 10월에 시작되어 2월까지 이어진 상담이건만 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가슴속 어딘가부터 끓어오르는지 모를 애틋함으로 후덥지근해졌던 내 몸이,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온몸이 얼음장이 되어버리는 듯 주위의 공기마저 싸늘하게 느껴졌다. 입을 떼려다 말고, 다시 하려던 말을 꾸역꾸역 목구멍 뒤로 삼켜 넣고 옷깃을 여미길 여러 번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어떤 말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계시다가 나에게 다시 질문을 바꾸어 물으셨다.
"윤호는 어머님과 있을 때, 어머님이랑 영화를 보고 예쁜 카페를 가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얘기해요. 어머님은 뭘 하실 때 가장 행복하세요? 어머니가 살아오셨던 날들 중 언제가 가장 행복했다고 느끼세요?"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 나로? 아니면 엄마로? 선생님의 질문에 어느 쪽의 화자가 되어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데 선생님은 마치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다시 질문을 고쳐 물었다.
"어머니로 말고요. 음.. 어머님 자신으로 살 때, 어머님 어렸을 때요."
아주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꿈이 많았고,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배우며 살 순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흉내만 내고 살았던 그때에도 너무 행복했었다.
"중학교 때요. 중학교 1학년 때, 축제날 춤 잘 추는 친구, 춤을 좋아하는 친구들 몇 명이 모여서 학교 축제 무대에 섰던 적이 있었어요. 무대 위에 서 있는 나에게 모두가 시선을 주목했던 그때.. 그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해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을 받길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합창단이나 학교 축제 등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춤추기를 즐겼다. 가끔은 노래 잘하는 친구와 교내 행사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순수하게 춤과 노래를 좋아했던 것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내게 전해지는 동경의 눈빛과 박수가 나에겐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누군가의 앞에서 노래하거나 춤추기를 좋아했던 나는 지금 그 어디에서도 그 생기 어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갑자기 봇물 터지듯 선생님에게 그 어릴 적 무대에 섰을 때의 쾌감을 설명하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날 보며 빙그레 웃고 있던 선생님의 얼굴 때문이었다.
"어머님, 저랑 상담하고 처음으로 웃고 계시는 거 아세요?"
아이에 대한 걱정과 고민만 가득했던 내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지고 목소리는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듯 가벼웠다. 잠시 아이의 생각에 울컥 눈물을 쏟아냈던 것을 제외하곤 시종일관 표정 하나 바뀌지 않던 얼굴과 낮고 무거운 음성의 내가 처음으로 아이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재잘재잘 선생님에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부모님과 재미있는 주말을 보내고 온 어린아이가 선생님에게 미주알고주알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내가 지금 한때의 이야기로 즐거워해도 되는 일인가 싶었다.
"어머님께 한 가지 숙제를 드릴게요. 어려운 건 아니구요. 다음 주 상담 날까지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것들에 대해 50가지 이상 적어오시면 돼요. 어떤 것이든 좋아요. 사물이든, 상황이든, 추상적인 어떤 것이든 다 좋아요. 무조건 50가지 이상 적어오셔야 해요. 아셨죠?"
그 말을 듣고 처음엔 뭔가 싶었다. 왜 내게 이런 것들을 적어오라는 걸까. 이게 과연 내 아이의 학교생활 태도 변화와 관계가 있긴 한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3-4일 정도는 그것을 잊고 지냈다. 선생님이 숙제를 주셨다는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상담 이틀 전날,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가 있다는 것이 생각나 공책을 펼쳐 들고 앉았다. 막막했지만 우선 적어내려 가보기로 한다. 하나, 둘 처음엔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적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 세어보니 이제 겨우 스무 개 남짓. 더 이상 좋아하는 물건도, 대상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 추상적이어도 어떤 상황이어도 괜찮댔지? 그렇게 다시 50가지를 의무적으로 채우기 위해 적어내려 갔다. 물론 진심으로 좋아하고 생각나는 것만으로 적고 싶어 지나온 모든 시간 동안 좋았었던 찰나의 순간까지 모조리 끌어모아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50가지를 훌쩍 넘겨 60가지가 넘도록 사소한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그저 스치는 찰나였지만 내겐 너무 행복했던 순간들을 쓰다 보니 계속해서 빈 종이를 채워가고 있었다.
슬슬 팔이 아파지기 시작할 때쯤, 아직 몇 가지 더 남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만 쓰기로 하고 연필을 내려놓은 뒤 가만히 종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것들을 좋아하고 있었으며, 하루 종일 24시간의 시간 중 언제라도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상담 날, 선생님께 이 종이를 건넸고 선생님은 내가 적은 글씨를 하나하나 읽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님 다운 것들이 참 많네요."
나다운 것이 뭔지 이 선생님은 진짜로 알고 있는 걸까. 그동안 상담 내내 겉으로만 보였던 나의 조용하고 진중해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나를 판단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생님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가장 나다운 것들만 적어두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날부터 나의 우울은 땅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혹시 몰라 병원을 통해 진행했던 아이의 심리 상담은 아이뿐만이 아닌 부모의 양육태도 검사와 육아 스트레스 등의 부모 심리검사까지 함께 진행되었고 그 결과 의학적으론 아이에게 별다른 심리적 문제는 없으며 집중력 부족으로 약물치료 정도만 하면 된단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심리 결과에서 가장 심각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육아 스트레스와 우울의 척도가 굉장히 높았고, 유년기에 형성되지 못한 부모와의 관계로 인해 내 아이에게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나라는 것이었다. 그 검사 결과에 나는 그동안 쏟아왔던 아이에 대한 부담감을 한꺼번에 모두 분출해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나에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허우적거렸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 그때 죽었어야 했던 나를 왜 살렸던 걸까, 내가 태어나서 이뤄놓은 게 대체 뭐지?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결혼을 했지만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고, 그래서 나의 아이는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겪으며 또래보다 좌절을 더 빨리 맛봐야 했고 나로 인해 나의 가정이 온전하지 못한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나를 갉아먹었다. 아빠의 불행이 나를 낳음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였는데 그런 내가 세상을 살아가며 나와 엮인 모든 이들을 불행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나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어째서..
좋아하는 것들을 적는 것으로 시작된 나의 뒤늦은 사춘기는 너무도 오랫동안 나를 동굴 속에 가두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그것도 혼자 집에서.
매일 눈을 뜨는 아침이 불행의 시작이 되는 것만 같았다. 눈을 뜨며 내가 왜 태어났는지를 고민했고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집 소파에 앉아 아무 이유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곤 했다. 나는 나 하나로도 너무 벅찼다. 서른이 넘은 어른의 몸을 하고 있는 나는 사실 갓난아이와도 같이 내 몸 하나 어쩌지를 못했다. 온 신경이, 온 마음이, 온몸이 마음의 어느 한구석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저 밑 구덩이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술 한 잔이 온몸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면 나는 그것들을 까맣게 잊었다. 이대로 사라질 수도 있겠다, 나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누굴 감당하겠다고 이 지독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걸까, 그냥 이대로 이렇게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때 나의 외할머니라는 여자의 말처럼 베개에 엎어놓고 죽었어야 했다고, 어쩌면 그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하루하루 내 몸을 짓눌렀다.
증세는 날로 심각해졌다. 남편이 날 끌고 신경정신과를 찾아 약을 타 먹고 상담을 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단순한 불안 에피소드로 분류된 나는 병명대로 에피소드로만 끝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거나 술을 마시고 있거나, 3개월을 그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흘려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큰 아이가 여느 때처럼 멍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물었다.
"엄마, 슬퍼?... 나 때문이야?"
그 물음에 먼 산만 바라보던 눈길을 아이에게 돌렸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있었다.
"나는 엄마가 술도 안 먹었으면 좋겠고, 그렇게 슬픈 눈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그런 거면 미안해. 나 이제 학교에서 애들이랑 싸우지 않을게. 수업 시간에 나가지도 않을게."
아이는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놀랍도록 잘 적응해왔다. 물론 가끔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기도 하고, 유독 한 친구와 잦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전에 비하면 심각하게 걱정할 수준도 아니었고 이젠 잘 타이르기만 해도 제법 엄마와의 약속을 잘 지켜줄 만큼 성장했다. 문제는 나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내 깊은 수렁.
덤덤하게 잘 묻어두었다 생각했던 나의 유년이 선생님과의 상담으로 인해 다시 파헤쳐지고 내 아이를 위해 진행했던 검사는 결국 내 스스로 나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게 했다. 하지만 상담을 한 것도, 심리검사를 한 것도 후회하진 않는다.
내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서 비롯된 내 모든 행동들이 자신의 탓인 듯 오해하고 있는 나의 큰 아이와 지난 3개월간 나의 행동들로 인해 갖은 노력으로 나를 다시 돌려놓으려 애를 쓰고 있는 나의 남편, 눈치 빤하게 엄마의 눈치를 살피는 다섯 살 둘째까지 온 가족들이 나 하나 제자리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3개월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술을 마시고 잊으려 했던 시간, 의미 없는 눈물로 채웠던 우울한 시간, 내가 그렇게 시간을 흘려버리는 동안 내 가족들은 나의 시간들을 계속해서 주워 담으며 내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고 애쓰고 있었다.
당시에도 자주 먹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 술을 먹지 않은 지 반년이 지났고 그 지옥 같던 시간에서 빠져나온 지도 반년이 지났다.
다시 나를 돌려놓고자 먹기 시작했던 약은 이제 처음 먹던 수준의 반의반으로 줄었고 수면제 없이 잠들지 못했던 나의 밤도 가끔은 수면제 없이 잠들 수 있으리만치 나의 가족들이 든든하게 감싸주고 있다. 그 때부터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이 감춰뒀던 나의 유년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나를 마음 깊은 곳으로 잠식시켜 버렸지만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잠식당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평화롭고 행복한 기억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유년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야 이 비겁한 기억이 나를 다시 우울로 끌어들이지 않을 테고 내가 그것을 글로 옮김으로써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 테니까.
비록 나 혼자 보는 글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다시 그 괴로운 기억들로 인해 우울로 끌려들어 가는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이고, 이 글이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려 나의 치부가 될지언정 나에겐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유년이 현재의 나를 망칠 수는 없다. 나는 그것을 불과 몇 달 전에 깨달았고, 나는 앞으로도 많은 날을 몸소 겪으며 깨달아 가겠지만 이제는 그것들과 함께 떨어지지 않을 각오가 되어있다. 길었다면 길고, 짧았다면 짧은 3개월과 올봄이면 이제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우울증 약은 내게 아주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너의 암울한 과거는 그저 흘러간 시간이라고, 현재의 너를 망치는 일에 쓰지 말라고.
나는 엄마라서 이겨낸 것이 아니다. 엄마라서 힘을 더 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기억을 모두 가슴에 품고도 그것들을 자근자근 밟으며 올라온 '나'이기 때문에 이겨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깊고 어두운 수렁 앞에 서서 내 손을 잡고 함께 끌려들어 올 각오로 나를 끌어올려 준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너로 인해 어둠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그때 나를 다시 데려가. 그땐 조용히 같이 울어줄게. 이미 난 죽고 없는 과거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