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가수 오디션을 보고 싶다고 그토록 졸랐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5년 전 지역 동요제 예선에서 탈락했던 것에 대한 조롱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당시 담임선생님은 춤추고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나를 중심으로 11월 학교 축제 무대에 치어리딩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셨고 당시 치어리딩 팀이 있던 강일여고와 연결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하기 싫다는 같은 반 남자 친구들 몇 명을 설득하여 함께 연습하며 그 해 11월,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영화 '브링 잇 온'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번 무대의 짜릿함을 느꼈다. 당시 학부모들과 다른 학교 학생들도 모두 관람할 수 있었던 축제였지만 나의 부모님은 오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내 동생이 그날 축제 무대를 보고 언니인 내가 어떤 무대를 보였는지, 얼마나 많은 박수를 받았는지 마치 자신의 일처럼 자랑을 늘어놓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주 냉랭했다.
"그러니까 헛바람이나 들지. 동요제에서도 짹 소리 한 번 못 내고 떨어지더니 이젠 춤으로 노선을 바꿨나 보다?"
삼류 딴따라. 보수적인 나의 아빠와 조롱 섞인 시선을 보내던 나의 새엄마는 가수가 되고 싶다던 나의 말에 늘 그렇게 대꾸했다. 그런 당신들도 '삼류 딴따라'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왜 나는 안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부모의 푸시가 없는 이상 지방에 살며 그 누구도 지원해주지 않는 내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포기했었는지도 모른다. 성공한 가수들이 어느 토크쇼에 나와 '몇 날 며칠 밤을 설득했다, 결국 부모님이 허락해주셨다' 등의 성공 스토리를 풀곤 하지만 나는 아예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오는 말이야 뻔했으니까.
그 길로 나는 가수의 꿈을 쉽게 포기했다. 대신 조용히 글을 쓰는 것으로 허전함을 대신했다. 당시 'daum' 카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던 시기였고 그중 인터넷 소설 카페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다. 인터넷 소설,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주인공으로 삼은 팬픽과 이른바 '얼짱'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당시 PC방에 꼭 있었던 하두리 캠으로 찍은 뽀얀 얼굴의 그들을 보며 인터넷 소설 속 주인공으로 가상 캐스팅을 해보기도 하고 '이달의 얼짱'을 뽑거나 그들의 패션이 엄청난 유행을 하는 등 유행의 트렌드 자체를 인터넷으로 옮겨 붙게 만든 시대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인터넷 소설 제목과 작가들이지만 '귀여니'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고, 나도 그녀의 소설을 보았기에 그 이름만은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우리 또래의 엄청난 성공은 나에게 꽤 큰 자극제가 되었다.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 왕따 여학생과 잘 나가는 일진 남자아이의 유치한 러브스토리, 뻔하디 뻔한 레퍼토리였지만 우리에겐 그것이 꿈이었고 열망이었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그런 꿈같은 이야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마 그즈음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들에는 당시만의 트렌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자세한 묘사를 생략하고, 마치 인터넷용 드라마를 보는 듯 인터넷 소설들에는 온갖 이모티콘이 난무했다.
'야, 정한경 ㅡㅡ^', '왜 구래^0^;;;;;',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ㅜ^ㅜ...' 등등 그땐 그게 이상한 줄도 모르고 마치 인터넷 드라마를 보듯 이모티콘으로 텍스트 속 인물의 감정을 읽어내려가곤 했다. 웬만한 글솜씨가 아니고서야 10대에 구사할 수 있는 표현력은 몇 되지 않으니 이처럼 시대를 잘 타고난 소설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싶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세한 묘사가 생략된 문장과 그 대신 그들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이모티콘, 특별한 글빨(?)이 아니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들은 족족 약간의 우울함이 서려있었다. 다음 사이트에 로그인해본 지 15년이 넘어서 이젠 예전에 쓰던 아이디가 뭐였는지, 내가 활동하던 카페 이름도, 활동 닉네임도 다 잊어버렸지만 아쉽게도 나는 꽤 많은 조회수를 기록해놓고도 그 작품들을 완성하지 못했다. 내가 시작하던 때는 이미 귀여니 이외에 수많은 인터넷 청소년 작가들이 출간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것이 영화로 제작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지던 시기이니 이미 난 출발한 배 뒤를 통통배로 쫓고 있는 격이었다. 커다란 배의 물살에 밀려나기만 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작은 통통배. 이미 인터넷 소설은 내가 중학교 1학년 즈음부터 유행하고 있었건만 나는 그 유행을 알아채는데 2년이 넘게 걸렸다.
나의 실패는 그녀에게 늘 기쁨이었다. 겨우 열여섯에게 실패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녀에게 나는 늘 그랬다. 복잡한 가정사와 맞물린 친구들과의 문제로 나는 중학교 3학년 5월, 자퇴를 선택했다. 사실 문제는 학교 축제 준비를 하던 그즈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티브이 프로그램에 내보내고 싶었다던 그때와 다르게 중학생이 된 나는 또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큰 데다가 얼굴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았고 성적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축제 무대에, 그것도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무대를 진두지휘 한다는 게 다른 친구들에겐 눈엣가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한 조각, 선생님들이 나를 '단장'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빌미로 친구들에게 갑질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나는 앞서 말했다시피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어서 당시 '일진'이건 아니건 남자 친구들과도 서슴없이 지내곤 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참 우습지만 당시 일진이라 함은 자신들끼리만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아니던가. 힘이 세거나 예쁘거나 싸움을 잘한다거나 등등의 이유로 동갑내기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자신들의 세력을 자랑하는 그런 무리들. 나는 그런 남자아이들과도 서슴이 없었다. 무리 짓길 좋아하는 여자아이들의 특성상 일진도, 뭣도 아닌 내가 일진 남자아이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 나이엔 별 것도 아닌 일에 웃고,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며 트집을 잡지 않던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표적이 되었고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던 그 무렵부터 은근한 따돌림이 시작됐다. 지금은 토요일에 등교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시기였지만 당시만 해도 토요일까지 등교를 하고, 12월 중순쯤 이른 겨울방학을 했다가 1월 중순쯤 개학을 해 한 달 정도 학교를 더 다니다 2월 중순부터 3월 2일 개학까지 봄방학을 했다. 축제가 끝나고서부터 시작된 은근한 따돌림은 1월 겨울방학 개학을 했을 땐 매우 노골적으로 변했고, 3월 개학을 해 새로운 반으로 배정이 되고 나서도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 몇몇이 새로 배정된 반 아이들에게 나에 대해 노골적인 험담을 하며 나를 그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면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털어놓았던 나의 가정사는 내가 따돌림을 당하자 그것은 나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왔고, 새엄마의 차별을 경멸하던 나의 이야기는 어느새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내 동생을 매우 싫어하고 괴롭히는 악질적 새 언니의 모습으로 와전되어 갔다.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았던 동갑짜리 동생 앞에서, 나는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아야 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집 창고에 숨어있다가 끌려 나와 울며 겨자 먹기로 교문 앞을 들어서던 그날, 하필이면 2교시 뒤 쉬는 시간이라 조회대 앞에 몰려있던 친구들 눈에 띄어 억지로 조회대 중간에 붙잡힌 그날을 나는 아직도 꿈에서 만난다. 일진 남자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꼬리를 치는 앙큼한 여우가 되었고, 차별과 냉대를 받던 나의 새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착한 엄마를 상대로 못된 소문을 퍼트리는 후레자식이 되었으며, 잘난 것 하나 없이 덩치만 큰 내가 선생님들에게 아양을 떨어 온갖 글짓기 대회와 축제 무대에 대표로 서게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날조로 나를 조롱했다. 적어도 50명은 넘었다. 정작 나와 싸우는 아이는 하나인데 그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과 이미 왕따가 되어버린 나를 그 애와 함께 조롱하기 위해 덤벼든 아이들이 족히 50명은 넘었다. 나를 에워싼 그 아이들 사이로 누군가 나의 동생을 데려왔다.
"너 얘 앞에서 솔직히 말해봐. 너네 엄마 새엄마라며, 얘네 엄마가 너를 그렇게 괴롭힌다며? 근데 승희 말로는 아니라는데? 얘네 엄마가 너한테 졸라 잘해준다는데? 와.. 미친년 이거 완전 패륜아네."
패륜아? 누가? 내가? 그럼 자기 엄마가 날 그렇게 괴롭히는 걸 안대도 과연 네들 앞에서 '응, 맞아. 우리 엄마가 언니 엄청 괴롭혀.'라고 얘기할까? 어느 누가 네들 앞에서 그렇게 얘기를 할까?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울지도 않았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수백 개의 눈이 너무 두렵고 무서웠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때마침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에도 나를 둘러싼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비켜서지 않았다.
"야, 승희야. 네가 말해봐. 너네 엄마가 미주 괴롭혀?"
나를 흘끔 쳐다보던 그 애가 작은 목소리로 "아니" 하고 말했다. 알고 있대도 아니라고 할 것이고, 모른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 애의 작은 대답에 다들 나에게 욕지거리를 한 마디씩 내뱉었다. 미친년, 패륜아, 재수 없는 년, 어쩐지 할머니가 무당이라더니 재수 없었어, 귀신 붙을라 에비. 그 조롱 속엔 나와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날의 일들이 내가 현재까지도 여자 친구들을 많이 두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며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털어놓지 않게 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래서 그 애와 그 여자가 나와 내 아빠, 그리고 우리 집을 풍비박산 내놓고 떠나버렸을 때 너희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대도 나에게 사과 한 마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중에 몇몇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너희들은 지난 일이라고, 어린아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이었다고 생각할 테지만 나는 그 덕에 열여섯부터 열여덟까지 2년 동안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와 만나는 날이면 무더운 여름에도 너희들과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다녔고, 턱끝까지 후드 집업 지퍼를 끌어올리고 다녔다.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나는 그 조회대에 너희들에게 둘러싸여 수백 개의 눈동자만 둥둥 떠다니는 꿈을 꾸고 악을 쓰며 잠에서 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지금 고상하게 아이들을 키우며 네 아이들에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절대 다투지 말라며 가르치겠지.
그래, 이해한다. 나도 두 아이의 엄마인지라 아이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좋은 것만 가르쳐주고 싶은 것. 엄마의 어두운 면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 나는 아직도 너희들을 가끔 꿈에서 보며 시달리지만 부디 좋은 어른이 되었길 바란다. 사과 한 마디 제대로 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길 바란다.
나는 그날 이후 자퇴서를 쓰고, 채 반학기도 남지 않은 중학교 졸업에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자퇴서에 사인을 하러 오던 그녀의 얼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혹시 살면서 누군가 슬픈 눈으로 웃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눈은 축 처진 모양만 슬펐을 뿐, 눈빛 속엔 기쁨이 가득했다. 나 스스로 구렁텅이에 몸을 던졌으니, 나 스스로 알아서 망가져 주었으니 그녀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바라는 대로 집 안에 골칫덩이가 되었다.
열아홉에 고졸검정고시까지 모두 마치고 대학에 가고 싶었던 내게 검정고시 졸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 형편에 예대를 가고 싶다는 게 양심이 있는 거냐며, 또 학교를 얼마나 다니다 때려치울 거냐는 조롱 아닌 조롱으로 나 대신 당신의 딸을 대학에 보냈다. 그것도 내 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