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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Jan 25. 2022

10. 나를 버티게 해 준 사람들.


 


자퇴서를 내고 난 후, 내게 가장 힘이 되어줄 줄 알았던 삼촌들과 할머니마저도 나를 한심한 인간 취급했고 당시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어떤 계획을 가지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한동안은 어린 백수가 되어 밤낮이 바뀌고 종일 컴퓨터만 붙들고 살았다.

 할머니 집 근방으로는 학교가 많다. 바로 뒤쪽으로는 강릉여자고등학교, 다리 건너편으로는 강릉 농공고(현재의 중앙고), 그리고 강릉중학교까지. 밤을 꼬박 새우고 잠이 들 무렵쯤이면 내 또래 친구들이 재잘거리며 학교로 향하는 소리가 들렸다. 벗고 싶어서 벗은 교복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버틸 수 있었던 일임에도 자퇴를 선택한 것은 나였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밤새워 게임을 해 비몽사몽 하다가도 내 또래들의 대화 소리만 들리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고 듣고 있는 모든 소리가 괴로워졌다.

 나는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고 1년 동안은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라도 다시 입학하라는 가족들의 권유에도 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1년을 늦게 입학하건, 2년을 늦게 입학하건 그 애들이 있을 것이다. 그 조회대에서 나를 쳐다보던 수많은 눈들이 각 고등학교마다 흩어져 있대도 내가 어느 학교로든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어차피 마주할 얼굴들이었다. 끔찍하게 싫었고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났다. 나는 결국 어느 학교로도 돌아가지 않았고 자퇴서를 낸 지 1년 후 8월 중졸 검정고시를 보고 그 1년 뒤 고졸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18살 되던 해였다. 결국 그 애들과 다시 마주칠 것이 두려워한 선택이었다.

 

그런 나를 밖으로 꺼내어 준 건 다름 아닌 나의 두 친구들이었다. 중학교 1학년, 1반부터 8반 중 나는 CA활동(계발활동수업) 중 '한문(漢文)'을 선택했었다. 1반부터 4반까지는 '컴퓨터', 5반부터 8반까지는 '한문' 수업을 선택한 아이들로 갈라져 있었고, 나는 가끔 한문책을 빼먹고 오기 일쑤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한문책을 가져오지 않았었다. 중학교 1학년, 4월이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있는 한문 수업에 몇 번이나 한문책을 빼먹고 오자 선생님께서 이번 한문 수업부터 책을 들고 오지 않으면 체벌을 하겠다는 불호령이 있었기에 나는 급하게 한문책을 빌려와야 했다. 한 수업을 듣는 같은 반 친구들 것은 당연히 빌릴 수가 없으니 다른 반 친구들 것을 급하게 빌려야 했는데 나는 다른 반 친구들 중에 아는 아이들이 없었다. 같은 초등학교에서 온 친구들이 몇 있긴 했지만 그나마도 그 애들과 친하지 않아서 누구에게 빌려야 할지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불쑥 내 앞에  누군가 다가섰다.


 "너 한문책 필요해?"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아이였다. 사람 머리 하나만큼 나보다 작았고, 꽉 동여맨 머리칼 위로 부스스한 잔머리가 심하게 곱실거리는 아이였다. 이제 쉬는 시간도 그래 봐야 2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 낯선 아이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응!" 하고 대답했다. 근데 얘는 내가 한문책이 필요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1층 중앙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양 쪽으로 나뉘어 있던 1학년 교실, 나는 6반과 중앙 현관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그러자 작은 몸이 통통 튀어 5반으로 쑥 들어가더니 곧이어 한문 책을 들고 그 부스스한 아이가 다시 나타났다.


 "아까 니네반 애들이 우리 반에 책 빌리러 왔길래. 너 7반 맞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이름이야 명찰이 달려있으니 알 테지만 내가 7반이라는 건 어떻게?


 "나도 가끔 너네 반에 책 빌리러 갔다가 너 봤어. 너네 반에 슬비랑 친하거든."


 얜 묻지도 않았는데 미주알고주알 잘도 얘길 해주었다. 때마침 종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후다닥 책을 받아 들고 우리 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애는.. 자기네 반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문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과 책에 쓰인 순서에 따라 한자를 적다 문득 '아, 이거 내 책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른 지우개로 지워보았지만 반질반질한 교과서 종이엔 지우개로 지운 자국과 내가 쓴 연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내 책도 아닌데, 어쩐담.. 이따 돌려줄 때 미안하다고 말해야겠다, 하고 생각했다.

 한문 수업이 끝나고 나는 5반 앞문 쪽에 다가섰다. 사실 그 아이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두리번거리며 그 아이를 찾다가 문득 한문 책 뒤에 쓰인 이름을 보게 되었다. '김슬기'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슬기야.. 김슬기."


 친한 친구도 없는 5반 앞문에 서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지루한 50분의 수업이 끝나고 난 후,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가 파묻혀 들었다. 그런데 뒤에서 날 툭툭 누군가 등을 토닥였다. 그 애였다.


 "아, 여기. 빌려줘서 고마워. 근데 내가 모르고 네 책에 한문 몇 자 따라 적었어. 지우긴 했는데.. 자국이 남았어."

 "괜찮아. 더 적어주지. 그럼 다음 나 한문 시간에 안 적어도 되는데."


 의외로 쿨한 반응에 나는 그 애를 향해 웃었고, 그 애도 나를 보며 웃었다. 그게 나와 슬기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 우린 자주 만났다. 그 애가 우리 반으로 오기도 했고, 내가 그 애네 반으로 가기도 했다. 그 애와 난 단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지만 우린 학교가 끝나고 자주 만났다. 지금의 제일고 뒤편에 살던 그 애네 집에 들러 라면을 끓여먹고 그 애가 빌려둔 만화책을 함께 보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학교에선 각자의 반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우린 학교가 끝나면 함께 놀러 다니곤 했다. 당시 유행하던 외계행성 콘셉트의 노래방이나 오락실, 지금은 없어진 중앙시장 안쪽 떡볶이 골목에 가서 떡볶이를 사 먹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와 더 가까워진 건, 아니 정확히 말해 각자의 속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건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부터였다.

 내가 한창 친구들과 갈등이 생길 무렵, 그 친구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갈등이 생겼고 학교에 가는 걸 무척이나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우린 각자의 고민을 해결해줄 순 없었지만 서로를 위로해줄 순 있었다. 각자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가장 잘 아는 때였으니까.

 중학교 3학년 5월 말, 자퇴서를 내고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석 달쯤 가출을 했던 때가 있었다. 겨우 중학교 3학년 짜리가 돈이 어디 있고, 지낼 곳이 어디 있겠는가. 당시 가출한 다른 친구가 얻어두었던 원룸에 얹혀살게 되었고 내가 그곳에 있는 걸 알게 된 슬기도 매일같이 학교가 끝난 후, 그 집으로 찾아왔다. 먼저 가출했던 그 친구네 언니가 아르바이트를 해 월세와 식비를 해결하면 나는 그 집에서 청소나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했다. 그럼 슬기는 자기 집에서 쌀을 퍼다 주거나 김치나 밑반찬 몇 가지를 훔쳐다가 그 원룸에 가져다주곤 했다. 그야말로 가출청소년들의 온상이었다. 하필 그 원룸이 슬기네 집과 가까워 그 집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슬기가 어느 날 오전, 학교에 가지 않은 채 그 집으로 찾아왔다.

 집 나온 아이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머무는 공간엔 술병이 여럿, 담뱃재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우린 결국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슬기도 그곳에 동참하길 원했다.

 

 "너 왜 학교 안 가고 여기 왔어?"

 "나도 자퇴서 쓸래."

 

 나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슬기는 학교에 가지 않고 마치 자유롭게 생활하는 듯하게 보이는 나를 따라 자퇴서를 쓰겠다고 했다. 나는 단박에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자퇴서를 쓴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후회했던 나였다. 차라리 더 버틸 걸, 조금만 더 버틸 걸. 미성년자인 내가, 겨우 열여섯인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고작 학교와 집을 떠나 한다는 짓이 이런 것뿐인데 이걸 너까지 따라 하겠다고? 이게 뭐가 좋아 보여서.

 

 "안 돼. 하지 마. 후회해. 백 프로 후회해. 절대, 절대 자퇴서 내지 마. 학교 그냥 다녀."

 "너 검정고시 볼 거라면서. 나도 검정고시 보면 되지."


 말처럼 쉬웠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가족들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나를 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떤지 뻔히 아는데? 겨우 자퇴를 한 지 한 달 만에 학교에 가지 않는 앳된 어린 소녀를 보는 눈길이 얼마나 냉담한지 깨닫게 된 내가 어떻게 너에게 자퇴서를 내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냈지만 너는 안 돼. 그냥 버텨. 힘들면 차라리 다 무시하고 버티다가 여기로 와. 여기 와서 욕하다가 가. 다시는 자퇴한다는 말 하지 마."


 그 뒤로 몇 번이나 더 슬기는 날 따라 자퇴를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슬기를 설득했다. 다른 친구의 언니가 벌어오는 돈으로만 살기엔 너무 눈치가 보여 무엇이라도 해보려 했지만 열여섯 살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법이 개정되며 만 18세부터 일을 할 수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부모의 동의서를 받아야만 가능했다. 물론 불법으로  미성년자를 고용하는 업종도 적지는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막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더운 여름에 집을 나왔던 나는 겨울의 초입쯤, 틈날 때마다 나를 찾아다니던 막내 삼촌에게 붙잡혀 집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리고 한동안 슬기와 연락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끌려들어 간 후 이듬해 8월 중졸 검정고시를 보고 그로부터 다시 1년 후 나는 고졸검정고시를 보았다. 사실 중졸 검정고시를 보기 전, 다니던 학교에 복학을 했었지만 내가 그 학교에 복학을 했다는 사실이 그날 그 조회대에 있던 동갑내기 친구들 사이에 퍼지며 복학한 내 학교생활을 또 송두리째 흔들어놓았고 나는 복학한 지 5개월 만에 다시 자퇴를 했고 자퇴 직후 바로 중졸 검정고시를 보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슬기와 간간히 싸이월드로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다행히 슬기는 자퇴를 하지 않았고 무사히 학교를 졸업해 고등학생이 되었다. 자칫 나로 인해 자퇴서를 따라 쓸뻔한 친구였다.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싸이월드에 올라오는 사진들에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잘 지내는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되기도 하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나에게 친구라곤 슬기 하나였고, 내 안부를 물어주는 이도 그 애 하나였다.


 열여덟이 되던 그 해, 평생의 친구 하나를 더 얻게 되었다. 종민이.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이었고, 한 때 나를 좋아했다던 그 애.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이야 그 역한 옛날 얘기 좀 그만 꺼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로 그 녀석을 놀려먹는 데에 자주 활용했다.

 종민이는 어릴 때부터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 녀석의 이마엔 커다란 점 하나가 있는데 이게 점이라고 하기엔 범위가 넓고 돌출된 부분이 없이 피부만 물든 것 같다. 나야 내가 관심 있는 것 외에는 워낙 무신경한 타입이고, 남들 눈엔 독특하게 보이는 것도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성격이다. 그냥 쟤는 점이 있나 보다, 하고 말았었지만 사춘기 아이들에겐 그게 아주 좋은 놀림거리였다.

 지금에 와서야 그 녀석이 워낙 말수도 적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란 걸 알지만 그땐 내 코가 석자인 마당에 그 녀석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런 내가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녀석의 편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아니 편이라기보다는 한 번의 친절 정도였다. 그리곤 나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내가 학교에 자퇴서를 내기 며칠 전, 그 녀석이 내 책상 위에 수줍게 편지를 놓고 갔었다. 내용이 자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대략 '좋아한다' 정도였다. 당장 내 학교 생활조차 숨이 턱턱 막히고 공포스러운 와중에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대수냐, 싶었다. 나는 그 편지 또한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렇게 내가 학교에서 사라지고 난 후, 열여덟이 되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녀석은 단박에 날 알아보았다. 짙은 남색의 농공고(현재의 중앙고)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우린 아주 친한 남사친, 여사친이 되었다.

 녀석과 처음 얘기를 나눌 때엔 녀석이 나와 같은 반이었다는 것조차 나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편지를 받았다는 것, 너 나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정도만 기억을 하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지고 난 후 다른 아이들에게서 내가 자퇴서를 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랐다고 했다. 녀석도 워낙 남의 일에 무관심한 타입이라 나를 좋아한다는 편지를 써놓고도 내가 왜 사라진 줄은 몰랐다나?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우리는 그 후, 마음 깊은 얘기를 자주 나눴다. 처음엔 슬기를 대신해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필요했고, 그런 녀석이 남자라는 게 다행이었다. 여자 애들은 보통 '비밀이야'라는 말을 잘 지켜주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이 꼭 남자라서 내 속마음을, 나의 고통을 털어놓은 것만은 아니다. 녀석은 그저 말없이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고맙게도 다른 소리 하나 없이, 어떤 감탄사도 없이, 어떤 행동도 없이 그저 가만히 나의 말을 들어주기만 할 뿐이었다. 녀석은 내가 하는 말이 길어질수록 더욱 견고하고 미동 없는 자세로 내 곁에 앉아있었다.

 내가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부터 시작된 나의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마음 깊숙한 곳까지 내려앉아있던 나의 우울함을 말하고 있었고 녀석은 언젠가부터 그런 내게 아주 짧은 위로의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령 나의 복잡한 가정사에는 '버텨',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해 슬퍼하는 내게 '돈 벌어서 가' 정도였다. 매우 기빠지게 만드는 현실적인 대답이었지만 녀석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너무 감성적인 자세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나는 아마도 녀석과 이토록 오래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옥천동 둑길 앞, 남대천 체육공원 벤치는 나에게 오랫동안 녀석과의 기억을 남긴 곳이다. 꼬박 3년 동안 우린 한밤중에 캔맥주 하나를 두고 앉아 날이 꼬박 새울 때까지 떠들어댔다. 시답지 않은 농담일 때도 있었고, 녀석의 지나간 사랑 얘기일 때도 있었으며, 바닥난 나의 자존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어쭙잖은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보다 들어주기만 하는 녀석에게 얘기할 때가 더 많았고 실제로도 나에겐 녀석의 그 침묵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누구는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녀석과 한동안 붙어 다니며 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놀러도 다니던 때에 녀석과 내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녀석과 나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질색하며 그저 친구 사이라고 변명하던 일들이 어느덧 귀찮아지는 때가 되었고 사귄다고 숙덕거리거나 말거나 관심을 끊는 지경이 되었다. 녀석이 어린 첫사랑과 이별을 할 때에도, 한 때 내 친구이자 녀석의 여자 친구였던 친구가 세상을 등졌을 때에도, 엄청난 뒤통수로 녀석을 떠나버린 세 번째 사랑을 할 때에도 나는 그냥 그의 곁에 녀석이 했던 그대로 의 아픈 마음을 그저 들어주는 것으로 나 또한 친구의 역할을 다했다.


 내가 녀석과 가까워지는 동안 슬기와는 저만치 멀어진 참이었고 나도, 슬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느 친구들이 그렇듯 잠시 멀어지는 시간이 있고 그러다 그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어느덧 내 곁에서 함께 해주는 시기가 찾아온다. 나는 그런 것을 친구라고 말하고 싶다. 시간의 부재를 잊게 만드는 사람.

 꼭 곁에 몸이 붙어있는 것만이 친구가 아니라는 것, 이젠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다 문득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을 때에도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이. 자주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 친구가 아니라는 것.

 나에겐 종민이와 슬기가 그랬다. 한 때의 오해로 멀어진 적도 있었고 내가 너무 일찍 결혼을 해버려 쉽사리 연락을 할 수도 없었던 나의 두 친구는 여전히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응원해주고 있다. 내 글을 자신의 글처럼 아까워해주던 슬기도, 아무 말없이 내가 쓰는 글에 눈길 한 번 쓱 주고 씩 웃고 마는 종민이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자 나를 지금껏 살게 해 준 사람들이다.

 전엔 참 유치하게도 사람에 순서를 기곤 했었다. 가족을 제외한 내 주변 사람들 중 누구는 1순위, 누가 2순위 그렇게 순서를 정해뒀던 내가 나이를 먹으며 사람에게 순서를 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도 이들이었다. 그저 나를 살게 하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웠던 그 시절 나의 친구들. 특히나 이른 나의 결혼으로, 내 남편에 대한 예의로 함부로 전화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의 남자 사람 친구 종민이는 가끔 카톡으로 나에게 '전화해서 속풀이 좀 하고 싶은데 전화도 함부로 못하게 일찍 시집 가버린 년' 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지만 어쩔 땐 그게 너무 진심 같아 미안해질 때가 많다. 우리가 아무리 친구여 도 이젠 서로의 곁에 있는 사람에게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친구들은 나의 유년을 모두 지켜보았고 나의 20대를 가슴 깊숙이 위로해주었으며 앞으로의 나의 길 또한 응원해주고 있다. 그런 그들이 나를 살게 했고, 나를 쓰게 했고, 나를 조금 더 따뜻한 어른으로 만들어주었다. 너희에게 어떤 마음으로 감사를 전해야 할까. 어둠만 가득했던 나의 유년에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던 너희들에게 나는 이 글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너희가 있어 나의 지난 시간을 아주 많이, 위로받았다. 내게 여럿의 친구는 딱히 필요 없다.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너희 둘이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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