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닮다 Jan 13. 2022

5. 피노키오, 음흉한 아이(1)

누구의 탓도 하기 싫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받았던 사랑에 비해 자존감이 한참이나 낮은 유년을 보냈던 것은 그 여자 때문이었다. 당신이야 이런 내 말에 "이래서 키워준 공이 없다"라고 말할 테지만, 정확하게 집어보자면 나는 당신 손에서 자라지 않았다.

지옥 같은 두 번째 새엄마와의 반년이 지나고, 다시 내가 어떤 위협도 없는 평안을 찾을 때쯤 세 번째 새엄마라는 여자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중학생 정도만 한 키에 야리야리한 몸매, 까만 단발머리에 까만색 가죽 재킷과 가죽 반바지,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차림새였다. 그런 그녀의 곁에 그녀를 닮아 작고 하얀 여자아이가 바싹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이쯤 되면 그런 끔찍한 일이 있은 뒤에 또 어떤 여자를 나의 엄마라고 들인 우리 아빠가 한참 이상해 보일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당시엔 나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우리 아빤 그때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일반적인 연애를  수십 번 한다 한들 이상한 나이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엄마가 되어줄 여자이기에 조금 더 신중을 기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차림새가 매우 인상적이었던 여잔 아빠보다 4살 연상에 나와 동갑짜리 딸을 두고 있는 이혼녀였다. 우리 집에 처음 인사를 왔던 당시의 차림새가 저 가죽 바지 차림새였다. 아빠와 만나기 시작한 지는 3-4개월 남짓. 아빠는 당시를 그렇게 회상했다. 아빠보다 열  몇살이나 많았지만 자식이 없었던 두 번째 여자에 비해 인상도 그리 나쁘지 않고 심지어 내 또래의 딸이 있는 여자였기에 전과 같은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은 실제로도 그랬다. 잠시였지만.

 

 어떤 사정인지 모르지만 그녀와 함께 왔던 그 여자아이는 우리 집에서 일주일 남짓 머물다가 본인의 집인 친할머니 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만 우리 집에 남았다. 두 번째 여자에게 갖은 학대를 받았던 나는 아무리 잘해주려 해도 경계 태세였다. 아빠나 그 외 가족들이 없을 때 이 여잔 또 어떻게 변할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서였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 여잔 나와 둘만 있는 시간에도 내게 늘 친절하고 다정했다. 음식 솜씨도 좋았고, 부지런하고 깔끔한 데다가 가족들에겐 물론이거니와 이웃 어른들에게까지 싹싹했다.

 그렇게 반지하 셋방에서 얼마간 살 부대끼며 정을 붙인 여자와 우린 할머니가 사는 바로 옆집에 단칸 방을 얻어 살림을 분리했다. 그마저도 할머니와 멀리 떨어지지 못하는 나 때문에 겨우 옆집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 방은 참 웃기게도 생겼었다. 3층짜리 주택 중 1층 집이었는데 당시 흔하지 않았던 강화문으로 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성인 평균 키 정도 될만한 길이의 좁은 주방이 있고 현관문 바로 맞은편에 미닫이문도 없이 널찍한 방 한 칸만 덩그러니 있는 집이었다. 집 구조는 여느 단칸방과 다를 바가 없지만 특이한 건 방 오른쪽 구석에 7살 어린아이가 양팔을 벌린 만큼의 폭으로 된 정사각형 모양의 돌출된 시멘트 구조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얼핏 주사위 모양 같은 그 돌출된 구조물에 올라서면 내 키와 천정 사이의 너비가 어른의 손으로 두 뼘 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그 구조물 자체가 꽤 크고 높은 편이었다. 아빠는 옛날 아궁이와 같은 용도로 쓰였던 곳을 시멘트로 덮은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계셨다. 그곳의 구석엔 2,3층 어디와 연결된 것인지 모를 하수관이 있었는데 낮에도, 밤에도 물이 졸졸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들렸었다.


어릴 때부터 춤추고 노래 부르길 좋아했던 나는 그 구조물을 나만의 무대라며 아빠와 그녀가 보지 않아도 혼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놀곤 했다.

살림 다운 살림을 처음 차리는 아빠에게 할머니는 마땅히 해줄 것이 없다며 5자짜리 옷장 세트를 해주셨었다.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어 대충 자를 대고 그려본 그때의 단칸방, 옷장이 자리를 많이 차지하긴 했지만 시멘트 구조물이 워낙 위로, 옆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저 방 전체를 그 구조물 하나가 다 잡아먹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곳은 나만의 무대였다.

 그곳으로 이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내 기억 속엔 할머니가 선물한 옷장에서 그녀의 옷을 모조리 꺼내 짐가방에 쑤셔 박으며 소리소리 지르던 아빠의 모습, 울며 나를 감싸 안던 그녀의 모습이 있다. 여전히 그날의 그 난리가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내가 옥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것. 그리고 무당의 손녀, 엄마 없는 아이라고 수군거리던 학부모들이 입학식 날 "미 엄마예요" 하고 인사를 하던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던 입을 꾹 다물어버리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이제 나도 그때의 그들과 같은 학부모가 되었지만 그 여자들같이 유별나고 소문 내기 좋아하는 학부모는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당신들같이 나이만 먹은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라 얘기해 주고 싶다.


 내가 1학년 입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할머니 집과 멀리 떨어진 교동으로 이사를 갔다. 현재의 교동택지가 조성되기 전, 지금 위치로 따지면 교동 현대 2차 인근의 외진 주택이었다. 지금은 터미널 쪽에서 택지로 넘어가는 방향으로 도로가 뚫린 곳이지만 당시에 그곳은 그냥 산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 즈음 택지조성 사업이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여전히 저곳 뒤로는 작은 동산이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위쪽 방향으로는 택지로 넘어가는 길, 아래쪽으로는 강릉 시외버스터미널 오거리. 그렇게 나는 옥천 초등학교에서 적응을 하기도 전에 교동의 영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처음 몇 달은 할머니와 떨어져 사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린 나이라 그런지 빨리 잊고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산속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오래된 구옥, 게다가 안에 화장실이 없고 집 바깥쪽 푸세식 화장실에 집으로 올라오는 계단을 제외하곤 온통 숲에 둘러싸인 집. 자려고 방에 누우면  바람에 나뭇가지가 쓸려 나부끼는 흉흉한 소리가 너무 무서웠다.

처음 전학을 가고 얼마 간은 할머니와 분리된 환경과 그녀와 아빠 그리고 나, 이렇게 세 가족이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을거다.


 그렇게 1년쯤 후, 나는 집안에서 거짓말쟁이, 노력하지 않는 아이, 엉큼한 아이, 음흉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나는 올해 10살, 6살 형제의 엄마다. 10살 아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엉큼과 음흉의 뜻을 아홉 살인 내게 덮어씌운 것이 바로 그녀였다. 우리 집 앞에 살던 신혼부부, 내게 가장 친구 같은 막내 삼촌 또래의 앞 집 삼촌을 나는 아주 친근하게 대했다.

 자라온 환경이 그랬다. 아빠를 포함한 5남매 중 둘째인 고모를 제외하곤 모두 삼촌들이었고 그나마 한 명 있는 고모도 일찍 시집을 가 나는 삼촌들과 아빠, 할아버지, 집안에 남자들이 더 많았고 그래서 남자들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을까. 이모보다 삼촌들에게 더 친근하게 대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여자는 나를 앞집 이모에게 "지지배가 아주 엉큼하기 짝이 없다니까."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었다. 당시 나는 엉큼하다는 말의 뜻을 몰랐다. 그저 그 말을 하는 그녀와 그녀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는 이모를 보며 '아, 좋은 뜻이 아니구나'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게 내 어떤 행동에서 비롯해서 나온 얘기인지 알 도리가 없는 아홉 살의 아이, 나에게 조금만 조심하라고 가르쳐주면 될 일이었다. 앞 집 삼촌의 무릎 위에 앉는다거나 삼촌의 허리를 감싸 안는 일 등 삼촌들과의 스킨십이 익숙한 내게 조금만 자세히 가르쳐주면 다신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아주 엉큼한 어린아이로 만들었고, 앞 집 이모는 그 뒤부터 나를 매우 꺼려 했다, 겨우 아홉 살짜리를.

 그 뒤로 그녀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 소풍 날 아침, 너무 들떠 잠을 설치다 일찍 눈을 떠보니 그녀가 부엌에서 김밥을 말고 있었다.


 "엄마! 무슨 김밥이야? 어? 나도 자랑해야지!"


 살림이 빠듯해 새벽같이 일을 나가야 했던 할머니는 옥천 초등학교 앞에 있던 작은 김밥 집에서 늘 김밥을 맞춰놓곤 하셨는데 집에서 직접 싼 김밥이라니! 그것도 이젠 '우리 엄마'가.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까지 다 나려던 차에 그녀가 내게 냉랭하게 했던 말.


 "너는 내가 김밥이라도 싸 주지. 우리 승희는 내가 싸준 김밥도 못 먹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확실히 나에게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너는 내가 있으니 소풍 때 김밥이라도 싸주지만 자신의 딸은 자기가 싸주지 못해 안타깝다는 그 말. 왜 그 말이 나에게 그렇게 공격적으로 돌아왔는진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그저 못 들은 채 했다. 어린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도 몰랐고.

 할머니와 살며 다른 건 몰라도 아침밥을 굶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늘 빵이나 시리얼, 밥과 국이라도 끓여놓았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 혼자 국에 밥을 말아 먹거나 소보로 빵 하나를 들고 학교에 가곤 했다. 하지만 2학년 소풍날 이후로 나의 아침은 더 이상 없었다. 처음엔 아침을 굶고 가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 2교시 후 쉬는 시간에 나오던 우유급식 중 내 몫의 200ml 우유 하나를 다 먹고도 성에 차질 않아 흰 우유를 먹지 않는 친구들의 것까지 내가 받아먹곤 했다. 겨우 아홉 살, 열 살. 지금의 내 아들 같은 아이가 아침을 먹지 못해 배가 너무 고파서 친구들이 먹지 않는 흰 우유를 3-4개씩 까먹는 그 광경이 상상이나 갈까. 어른이 된 지금, 아침잠 많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내 아이의 아침밥을 먹이려는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다. 지금 내가 우유를 먹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고.

 

 어느 날, 학교에 갔다 오니 그녀가 낯선 여자와 함께 안방에 앉아있었다. 책가방을 내려놓고 나오기가 무섭게 내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며 언덕 밑 슈퍼에 가서 그 돈만큼 소주를 사 오고 너도 과자 하나 사 먹으라며 나를 내보낸 일이 있었다. 초겨울이었고 나가기 너무 싫었지만 과자라니까, 먹고 싶은 과자 아무거나 하나 사 먹으라니까 평소 잘 안 사주던 비싼 과자를 사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냉큼 돈을 받아들고 언덕을 내달렸다. 언덕 밑에 다다라 천천히 걷다 보니 소변이 너무 마려웠다. 사실 책가방을 내려놓을 때부터 마려웠지만 그 푸세식 화장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응이 되질 않아 갈까 말까 망설이던 차였다. 언덕을 내려가면 그 근처로 갈대가 죽 늘어선 얕은 구덩이 하나가 있었다. 나 하나가 앉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보다 키가 큰 갈대들이었다. 귀신 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 화장실보다야 갈대가 가려줄 구덩이가 나을 것 같았다. 주머니가 없는 바지를 입고 나온 데다 너무 신이 나 점퍼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 돈을 넣을만한 곳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냥 손에 쥐고 볼일을 보면 됐을 것을, 그 돈을 굳이 내가 소변보는 자리에서 한 뼘쯤 멀리 두고(젖을까 봐) 볼일을 보다 순간 바람이 휙 불며 돈도 그대로 휙. 저만치 나뒹구는 돈이 보이는데 이미 시작된 소변을 끊을 수도 없고 바람에 나뒹구는 돈에서 눈을 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내 돈!" 하고 외치기만 했다.

 바지를 추켜 입는 동안 돈은 감쪽같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겨우 초등학교 2학년짜리에게 만 원은 큰돈이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분명 반대편 논밭 구덩이로 날아갔으니 그쯤 어디 있을 텐데, 미간을 찌푸린 채 찾던 내 표정이 점점 눈꼬리가 처지며 울먹울먹거릴 때쯤 다시 한번 바람이 세게 불었고 나는 그럴수록 더더욱 온 논밭을 헤매고 다녔다. 결국 돈은 찾지도 못하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쭈뼛쭈뼛 집으로 다시 돌아갔을 땐, 내가 돈을 받아들고 나간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나있었다. 그조차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로 알 수 있었다.


"나간 지 한 시간이 넘도록 어딜 쏘다니고 온 거야! 옷 꼬락서니는 또 그게 뭐고!"

"돈을.. 잃어버렸어요.."

"뭐?"

"오줌 마려워서 오줌 싸려고 돈을 바닥에 냅뒀는데.. 바람이 불어서.."


 누가 들어도 황당한 말일 것이라는 걸 안다. 어린아이인 나조차도 황당했는데 어른들이야 오죽할까. 하지만 그날의 내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적어도 믿어주는 척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걸.

 길게 묶은 머리 여기저기 낙엽이 붙어있고 입고 나갔던 분홍색 골덴바지 무릎이 새까맣게 될 정도로 온 논밭을 기어 다니며 찾았건만 그런 내 모습엔 아랑곳없이 방문을 열고 낯선 여자를 불러 내 모습을 손가락질하며


"하하, 얘가 돈을 잃어버렸단다. 어디 가서 실컷 놀다가 들어왔구만. 너 그 돈으로 과자 사 먹었지? 들킬까 봐 거짓말하는 거지?"


 묻는 게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큰돈을 잃어버려 속상했고, 혼날까 봐 겁이 났던 상황에 거짓말쟁이로 몰리기까지 한 나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부터 뚝뚝 흘렸다. 아니라고 변명부터 안 하고 울음이 먼저 터져버린 것이 죄라면 죄였을까, 나는 그날 그녀에게 그리고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종아리 10대씩 총 스무 대를 번갈아가며 맞아야 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스무 살이 넘었을 때에도 자신은 그날의 내 변명이 우스웠던 건지


"너 그때, 바람에 돈 날아갔다고 한 거 뻥이지? 다 쓴 거지? 이젠 솔직하게 말해~"


라고 말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정말 잃어버린 거였다고, 나도 내가 멍청한 거 알지만 그땐 손에 쥐고 있을 생각을 못 해서 바닥에 둔 거라고 얘길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을 뿐이고, 나는 그렇게 거짓말쟁이에 엉큼한 아이로 10대를 맞이했다.



이전 04화 4. 기억하지 못해도 사진은 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