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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Jan 11. 2022

4. 기억하지 못해도 사진은 안다.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나의 이야기들은 무척 무겁고 어두운 편이다. 이 어두운 시간들을 전부 옮겨놓기엔 버거워질 것 같아 잠시 환기를 시켜볼까 한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나 하나만큼은 좋은 옷, 비싼 인형, 양질의 동화책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바비인형이 많지는 않았어도 당시 나오던 인형의 집 세트 2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 눕히면 눈을 감고 일으켜 세우면 눈을 뜨는 아기 인형, 커다란 곰인형은 셀 수도 없었다. 젊은 아빠의 친구들, 고등학생이던 막내 삼촌의 친구들, 고모와 고모의 친구들까지. 막내 삼촌 이후로 아이가 없었던 집에 생긴 늦둥이 같은 나의 존재는 아주 반갑고도 생경했을 것이다.

 고등학생이던 삼촌은 조카가 생긴 것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했으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어릴 땐 다들 '뽀뽀뽀'나 '하나 둘 셋 유치원'에 내보내 보라고 할 정도로 예뻤다고 했다.

제 눈에 안경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남의 아이에게 못생겼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막내 삼촌은 이맘때 아장거리며 걷는 날 데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신들도 불과 고등학생일 뿐이었음에도 겨우 3-4살인 나를 무척이나 예뻐했고, 지금도 삼촌 친구들은 나를 그때의 어린아이 대하듯 한다.


 당시 아빠 또한 겨우 이십 대 초반으로 군대에 가야 할 나이였지만 이른 나이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방위, 지금으로 말하자면 상근예비역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의 기억 속에는 아주 어렴풋하게, 물안개 낀 수평선 마냥 희미하게 남아있지만 아빠에겐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한 듯 어린 나와의 기억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상근예비역 소집해제가 되면서 그 길로 경기도 포천의 한 공장에 취직을 해 나를 데리고 잠시 그곳에 살던 때라고 했다. 어느 왕릉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진달래 잔뜩 피던 어느 봄, 나와의 추억을 아빠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근처에 살던 고모가 곱게 빗어 묶어준 머리, 누가 봐도 형편이 어려웠을 거라 예상할 수도 없게 단정하고 값비싸 보이는 원피스, 철 철마다 바꿔 신는 구두. 아빠는 내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사진이 대신 얘기해 주고 있다.

경기도 포천에 거주할 때까진 나의 생모가 같이 살았다고 했다. 다만 집을 나가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아빠가 찾으러 다니기 일쑤였고 그러면 나는 고모에게 잠시 맡겨졌다가 생모를 찾아오면 나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그렇게 나의 생모가 수차례의 가출을 반복하는 동안 아빠는 공장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강릉으로 돌아온 후, 생모는 영영 떠나버렸다. 그리고 아빠도 더 이상 그 여자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강릉으로 돌아와 다시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난 당시 꽤 규모가 크고, 유치원치곤 치맛바람도 굉장했던 성화 유치원에 입학을 했고 그곳에서도 할머니와 살고 있는, 엄마 없는 아이라는 얘기에 다른 학부모들이 술렁거렸다. 그나마 유치원이라서 다행이었던 걸까, 할머니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무탈하게 유치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유치원 졸업을 하기 전 졸업생 학예회를 했었는데 나는 그때 내 의도와 상관없이 부채춤과 촛불 춤 무대에 올라야 했다. 두 무대 모두 학부모들의 사비로 한복과 드레스를 사야 했으며 95년 당시 돈 7만 원이란 거금을 들여 촛불 춤에 입을 드레스를 구입해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빠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그 자리에 세웠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내가 중학생 때까진 유치원 학예회 비디오가 집에 있었다. 그 또한 당시 돈 3만 원을 주고 사야 했던 것이었다. 나에게 추억의 기록을 남겨주지 않은 게 없었다.

비디오테이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면들. 유치원에서 부채춤을 연습하는 동안 나를 포함한 몇몇의 친구들은 부채 끄트머리로 수차례 머리를 맞아가며 부채 파도 대형과 각도를 맞춰야 했다. 6-7살 아이들에겐 나무로 만들어진 그 부채 끄트머리가 송곳과도 다름없었다.

겨우 이 대형 하나를 하자고 이 작은 아이들 머리를 그렇게 수차례 때리던 그때의 담임 얼굴은 아직도 기억난다. 아이에겐 즐거운 기억만 오래 남는 것이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맞았던 기억, 무섭고 공포스러웠던 기억도 고스란히 남는다.

재미있었던 일이 하나 있다면 학예회 날 아침, 우리 집 온 가족들이 총출동을 하기 위해 무척이나 분주스러웠다. 다들 카메라를 찾고, 필름 여분을 챙기고 우리 딸, 조카, 손녀의 졸업 학예회니 꽃단장들을 하느라 여념이 없어 나 혼자 양말을 찾아 신어야 했다. 분명히 선생님이 흰 양말을 신고 오라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흰 양말이 보이지가 않았다. 할머니를 붙잡고 물어봐도 서랍 안에 있다는 말씀뿐, 나는 아무리 뒤져봐도 흰 양말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나만 저 대형에서 초록색 아니 군복 색상 같은 카키색 양말을 신은 채였다. 덕분에 모두 부채를 일자를 펴고 섰을 때 내 발만 덩그러니 카키색. 아빠는 그게 뭐가 좋은지 깔깔거리고 웃었다. 당시 나는 무척 속상했건만.

부채춤을 추고, 촛불 춤을 추는 동안 바로 맞은 편쪽에서 비추는 조명 때문에 막상 나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건만 날 부르는 목소리는 여럿이었다.


 "미주야, 여기 봐 여기!"

 "미야, 왼쪽 봐봐, 왼쪽!"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빠 그리고 아빠의 친구. 그날 우리 가족은 참 극성스럽게도 엄마의 빈자리 하나를 채우고자 여덟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빠, 막내 삼촌, 고모,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친구 2명과 아빠 친구의 와이프까지.

 나 하나 기죽이지 않겠다고 모여든 사람이 여덟 명이나, 그것도 가족도 아닌 사람들까지 전부 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일이다. 요즘은 전처럼 친구의 딸을 위해, 내 조카를 위해 그렇게 극성스럽게 쫓아다녀 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얼마나 되겠는가 싶을 때가 많으니까.

 그렇게 우리 가족은 나 하나를 지키겠다고 당신들의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왔다.

꽃을 좋아하는 아빠는 나와 꽃구경 다니기를 좋아했고, 매년 봄이 되면 꼭 경포 벚꽃축제에 데려가 주었다.

2002년 태풍 루사 때 꺾여 지금은 사라져 버렸지만,  경포대 앞 벚나무들 중 가장 큰 거목 아래서 내 사진을 찍어주고 천천히 경포 호수를 걸어 경포 횟집들이 쭉 늘어선 도로변을 걷다 보면 나오던 '유리집'에 날 데려가 함박스테이크를 사주던 게 아빠와의 벚꽃놀이 코스였다. 내가 함박스테이크를 먹는 동안 아빠는 내 맞은편에 앉아 맥주를 한잔 마시고 또다시 경포 호수를 돌아 집으로 돌아가던 그 저녁의 달.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벚꽃을 보면 너무나 설렌다. 아빠와의 벚꽃 놀이를 기다리던 그때의 나만큼 천진한 모습으로.

가족들은 어린 나를 끊임없이 지켰고,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존재였다. 일부러 낸 생채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내 가족의 사랑 속에 따뜻하게 자랐고, 또 끊임없이 불안정하게 살아왔다. 나를 둘러싼 이 단단한 벽이 허물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를 둘러싼 벽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고 마치 언제 그 구덩이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떠안고 살았다. 그것은 내 가족들이 만들어뒀다기보단 내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에 더 가까웠다.  나를 향한 불편한 시선과 온갖 소리들을 든든한 벽들이 모두 막아주고 있었건만 나는 내 스스로 그것들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나의 막내 삼촌은 나에게 친구가 되었고, 나의 아빠는 나의 방패가 되었으며, 나의 할머니는 나의 엄마가 되어주었다. 어린 조카가 너무 예뻐 자랑하고 싶었다던 젊은 나의 막내 삼촌은 오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고 그동안의 세월이 너무도 고달팠던 아빠는 젊었을 때보다 낭만도, 감성도 사그라든 시니컬한 모습을 보여주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빠는 나와 걷는 벚꽃길을 좋아한다.

목련 싹 하나하나, 진달래 잎 하나하나에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는 아빠는 지금도 나에게 "아빠가 장평에 살 때는 말이야." 하며 '라떼는-'을 시전하고 계시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가만히 아빠의 얘기를 들어준다.

 내가 묻는 말에 수없이 대답을 해주던 아빠의 말을 이제는 내가 들어줄 차례가 된  것 같아서.

 

 기억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추억이, 추억이 아닌 것은 아니다. 남겨진 사진이 그때의 우리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고, 라떼는-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꼰대여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되짚어보기 위함일 뿐이다.

 내 기억에 없는 나는 꽤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것을 이 사진들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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