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죽었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였을까. 나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외할머니란 여자의 말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죽으면 어떻게 되냐는 말을 자주 묻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기억나는 6살의 그날 밤. 옥천동 한 슈퍼 옆, 방 두 칸짜리 반지하에 셋방살이를 하던 때였다. 좁디좁은 방 한 칸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나. 그보다 조금 더 큰 방엔 아빠와 막내 삼촌, 그리고 두 번째 새엄마가 함께였다. 오동나무로 짜인 할머니의 신당까지 들어서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좁은 방 안에 우리 셋이 눕고 나면 남는 공간이 없었다. 관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건만, 꼭 관 속에 들어가 관뚜껑까지 덮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땐 그런 표현을 할 줄 몰라 그저 답답하고 힘들었을 뿐이다. 연탄을 갈고 들어오는 할머니에게 매캐하게 베인 연탄 냄새를 맡으면서도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할머니, 할머니 죽으면 나 이제 할머니 못 봐?"
왜 그 나이에 그런 걸 물었는지 모르겠다. 여섯 살 어린아이에게서 나온 말치곤 놀랄 만도 하건만 할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에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나는 할머니의 가슴팍에 더더욱 얼굴을 파묻으며 다시 물었다.
"할머니 죽으면 나는 누구랑 살아?"
어째서였을까. 누구의 죽음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린 나는 어째서 할머니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걸까.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지만 한때의 호기심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냐면 나는 서른넷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기분을 느끼고 있으며 그럴 때마다 수면제를 처방받아먹어야만 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서슴없이 나의 생모에 대해, 나의 외할머니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너 낳고 나서 베개 위에 엎어놓고 죽였어야 했다는 둥, 고아원에 버리고 왔어야 했다는 둥 하며 나를 어떻게 해서든 눈앞에서 치우려고 했었지만 네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든 너를 키우려고 애썼노라고. 나의 할머니가 나를 지키려고 했던 노력을 얘기해 주고 싶어서였겠지만 어린 나에겐 내가 태어나선 안되는 존재였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의 죽음에 관해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지금 흔히들 말하는 공황장애처럼 자다가도, 학교에 있다가도 내가 죽는다는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어째서 나의 죽음에 관해 생각을 해놓고 나의 질문은 온통 할머니가 죽으면 할머니를 보지 못하냐는 질문이었냐는 것. 그것은 내게 곧 할머니의 존재가 나의 존재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이 늘 내게 강조했던 말들, '네 할머니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 할머니가 너 그 집에서 내다 버리려는 걸 어떻게 말려서 뺏어왔는데' 와 같은 말들이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할머니 때문이라는 걸 상기시켜서 일 것이다. 나는 할머니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할머니가 나를 지켰기 때문에 살고 있다고 늘 강조하던 어른들 때문에.
그렇지만 어른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그렇게 어린 내게 '네 할머니의 고생'을 상기시켜주려 하기 전에 어린 내가 어떤 상처를 받을는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어른이 된 나는 지금까지도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죽음에 관한 생각만 하면 자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나가버린다. 이 방 안에, 내게 가장 편안한 휴식처가 되어주는 이 공간 안을 벗어나 바깥공기를 마시고 들어와야만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른들은 내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겼고, 신경정신과를 가서 아무리 상담을 받아도 그저 불안장애라는 말 밖에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여섯 살 때부터 생긴 트라우마다. 이게 과연 불안장애라는 병명 하나만으로 해결이 되는 문제인 건지 의사들에게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이겨내 보자는 말. 내가 이겨낼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잠들기 전, 그런 생각들을 하던 것과는 달리 평소의 나는 여느 여섯 살들과 다를 바없이 평범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런 내게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바로 두 번째 새엄마 때문이었다.
아빠는 나의 생모가 떠난 지 3년 후 나의 엄마가 되어 줄 여자를 한 명 데려왔다. 어린 내 눈에도 아빠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사납게 치켜올려진 눈썹, 날카로운 눈매, 얼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팬 곰보자국과 앙다문 작은 입술이 어쩐지 무서웠지만 내 기억 속에 남겨져있지도 않은 생모에 비하면 '새엄마'라는 그 이름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 여자는 내 환심을 얻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준다든지, 인형을 사다 준다든지 하며 좁디좁은 이 반지하 셋방에 몸 한 켠 뉘여보고자 애를 썼다. 그러기 위해선 어린 내가 필요했으리라.
하지만 그 여잔 금방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엄마의 존재가 절실했던 나는 아주 쉽게 마음의 문을 열었고, 그 여잔 아빠와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 들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에겐 지옥 같은 날들이 시작됐다.
할머니는 당시 신내림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가장 신발이 좋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굿판에 불려가는 일이 많았고, 자연스레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건강이 좋진 않으셨지만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막노동을 나가시던 50대 젊은 나의 할아버지와 아빠, 학교를 다니던 막내 삼촌까지 집을 비우고 나면 집엔 나와 그 여자만이 남아있었다.
어느 날, 점심때가 되어도 밥을 주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엄마, 밥 주세요." 하고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처음엔 그냥 손으로 툭 쳐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배는 고프고,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여섯 살의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던 그녀는 넓지도 않은 집에서 부엌으로 쿠당탕 달려가 익히지도 않은 분홍소시지를 껍질째 내 입에 물렸다.
"이거나 쳐 먹어."
그리곤 다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웠다. 살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 누구도 내게 그렇게 우악스러운 말과 거친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어린 나는 눈물도 흘리질 못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잠시 분홍소시지를 물고 있다가 주방으로 가 쌀통을 밟고 올라가 가위를 꺼내 분홍소시지의 꼭지를 잘라 그 채로 비닐을 벗겨 한 입 베어 물었다. 계란 물을 입혀 부쳐주던 할머니의 맛과는 확실히 다르게 차갑고, 퍽퍽했다.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기다란 분홍 소시지를 반절이나 뚝 떼어 오물오물 씹어삼켰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빠와 할아버지, 삼촌이 돌아왔을 땐 내가 이로 베어 문 분홍소시지 끄트머리는 온데간데없이 노란 달걀물로 곱게 부쳐진 분홍소시지와 나물 반찬, 된장찌개가 저녁상에 올랐다.
그날 늦은 저녁, 굿판을 끝내고 돌아온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 미주알고주알 그날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낮에 있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점심은 뭐 먹었어?"
"소시지."
"소시지에 밥 먹었어?"
"아니, 배고파서 엄마 깨웠는데 엄마가 그냥 소시지만 주고 다시 잤어."
내 말 한마디에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의 불을 켜고 옆방으로 쫓아들어갔다. 어미 없는 티 안 나게 하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좋은 옷, 좋은 거 먹여가며 키운 손녀딸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그렇듯 끼니 거르는 일은 절대로 용납을 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나에겐 더더욱 그랬다. 불같은 성미의 할머니는 그 여자에게 쫓아가 나에게 점심을 뭘 줬느냐 물었고, 그 여잔 무어라 대답을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 놀란 나는 할아버지 품에 안겨 그저 벌벌 떨기만 했을 뿐, 그 후의 대화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 후, 나와 둘만 있을 때 그 여자의 행동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식구들이 나가고 나면 나만 남겨둔 채 나갔다가 식구들이 돌아오기 전 돌아온다거나 내게 갖은 정신적 학대를 일삼았다. 밥을 안 주는 건 물론이었고, 집에 있는 과자도 먹질 못하게 했으며 모두가 나가고 없는 아침, 유치원에 가기 전 양치질이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에는 물바가지로 머리통을 수차례 얻어맞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전처럼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오늘 있었던 일, 네 아빠나 할머니한테 말하는 날에는 너네 아빠 죽이고 너도 죽일 거야."
아주 정확하게 기억한다. 2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자의 얼굴, 그 말투,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 여자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그 여자의 갖은 학대를 견뎌야 했다. 아빠를 죽인다고 하지 않는가. 엄마도 없는 내게 아빠까지 없으면 어쩌라고.. 여섯 살이기에 믿었고, 그래서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 죽음에 관한 내 시선은 점점 더 뿌리 깊게 내 안을 파고들었다. 우는 날이 많아졌고, 말하지 못하는 날이 길어졌으며, 할머니가 없으면 안 되는 하루하루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굿판에 데려가달라고, 이유는 말하지도 못한 채 나만 남겨두고 가지 말라고 악다구니를 쓰는 날이 점점 잦아지자 할머니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미주야, 엄마 생기니까 좋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그때 아주 현명한 질문을 하신 거였다. 누가 널 괴롭히니? 보다 누가 너에게 잘해주니?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고 어르신 거였다.
나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내게 다시 물었다.
"할머니 내일 노암동 할머니(할머니의 신 할머님)한테 갈 건데 따라갈래?"
나는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할머니의 굿판을 따라나서기 시작했고, 점차 그 여자와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한동안 말도 않고 내색도 않던 내가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다시 예전의 모습처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늘어놓자 할머니는 확신을 하신 것 같았다.
어느 날, 할머니가 오늘은 굿판에 데려가지 못한다고 하시며 나를 남겨두고 나가던 때. 할머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울고불고 매달렸지만 그날만큼은 단호하게 안된다고 하며 가시던 할머니를 뒤로하고, 두려움에 떨던 내게 그 여자는 한글을 가르쳐 주겠다는 명목으로 날 막내 삼촌의 책상에 앉혀둔 채 사정없이 내 뒤통수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 맞다 울다 맞다 울다, 내 곁에 서서 윽박을 지르던 그 여자의 쇳소리 사이로 드르륵 쾅 하며 문이 열렸다. 아빠였다.
할머니는 미주알고주알 말도 잘하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지자 아빠에게 이야기를 하셨고, 한동안 나를 굿판에 데리고 다니시며 내가 괜찮아지길 기다렸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나를 그 여자에게 남겨두고 나가신 사이, 할머니와 미리 계획을 세웠던 아빠가 들이닥친 거였다.
아빠 앞에선 천사같이 내게 잘해줬던 그간의 모습들, 그리고 집 밖에 서서 한참 동안 우는 내 목소리와 고함 고함을 지르던 그 여자의 쇳소리를 듣던 아빠가 결국 그 여자의 본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그렇게 그 여자는 우리 집에서 채 반년을 살지 못하고 쫓겨났지만 나에게 그 반년은 지옥과도 같았고, 여전히 죽음에 관한 트라우마를 더 짙게 만든 장본인으로 남아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트라우마는 점점 짙어졌고,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나의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할머니의 세월도 흐르고 있으며 이제 그 이별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할수록 내 존재의 의미도 희미해져 간다고 느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그것조차 무뎌지는 때도 있었지만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다시 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만 같다.
어떻게 이 짙은 그림자를, 이토록 오랫동안 따라다닌 그림자를 지워낼 수 있을까.
이건 누구의 탓인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모진 말들을 들었는지를 계속해서 세뇌시킨 친척들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못된 계모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 말을 모두 믿은 어린 나의 잘못일까.
나에게 죽음은 그리 멀지 않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나도 그 속에서 그들과 함께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을 매일같이 상념 하지 않는다. 나만 이렇게 죽음 속에 들어와있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이곳을 벗어나야 할까. 많은 고민이 들게 하는 밤이 다시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