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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닮다 Jan 06. 2022

1.동정받는 삶을 산다는 것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그녀가 나를 낳았기 때문이고,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내가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녀는 내가 태어나고 3년 뒤에 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겨우 스물하나, 내 아버지도 어렸고 그보다 두 살 어린 내 어미 또한 자신의 선택에 후회했었는지도 모른다.

 마흔다섯, 젊은 할머니의 손에 맡겨진 나는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좋은 옷을 입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으며 자랐다.

 내가 태어나기 전 장평 깊은 산골에서 살던 가족은 할아버지의 투병으로 큰 병원과 가까운 강릉으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투병과 아직 학교를 채 졸업하지도 못한 아이들 다섯, 할머니에게 선택권이란 것은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투병과 함께 실질적인 가장이 된 할머니는 핫도그와 호떡 장사, 생선을 떼어다 팔거나 남의 집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할아버지의 병원비와 당시 함께 사셨던 증조할머니(할머니에겐 시어머니), 그리고 아빠를 포함한 아이 다섯의 입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당시 강릉에서 꽤 유명했던 한 식당의 찬모로 일을 하게 되며 푼돈벌이 장사를 하는 것보다 형편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저축을 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결국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나의 고모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나의 큰아버지까지 원양어선을 타며 집안 살림을 보태고자 노력했지만 형편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가난한 집에 갓난 장이라니. 그것도 열아홉 어미와 스물한 살의 아비, 제 앞가림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들에게서 나온 나는 어쩌면 할머니의 어깨에 더 얹어진 짐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겨우 3-4살이던 내 기억에 아직도 표독스럽게 남아있는 외할머니란 여자는 나를 죽도록 미워했다. 이제 졸업을 앞둔 수재 중에 수재인 딸이 제 발로 가난한 집으로 기어들어가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으니 내가 오죽이나 미웠을까. 당신 딸의 선택이었지만 그 미움은 전부 나에게로 향했다. 내 앞에서 서스름도 없이 "낳자마자 엎어서 죽였어야 했는데" 라거나 "고아원에 갖다주라니까, 지금이라도 저 집 몰래 멀리 고아원에 갖다 버리고 너도 새로 시작해" 라던지의 말을 하곤 했다. 아주 어릴 때라 명확한 기억은 아니나 늘 그때 죽였어야 한다든지, 갖다 버렸어야 한다든지 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사람이었다, 그 여잔.

 그 여자의 말이 먹혀들었던 걸까. 나의 생모는 내가 4살이 채 되기 전에 집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애미없이 할머니 손에 크는 불쌍한 아이라는 주변의 쓸데없는 동정을 받아야 했고 어린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관심의 표현인 줄 알고 자랐다.

 

"경은이 또 나갔다며?  쯧쯧, 미불쌍해서 어쩌나."


 가까운 친척들이 나를 바라보던 측은한 표정과 가까운 이웃들이 건네던 동정의 한 마디, 그리고 더불어 생기는 과자와 사탕, 옷 등 그것이 동정의 손길이라는 것을 몰랐던 난 더더욱 엄마 없는 티를 내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은 말이건만 나는 할머니랑 살아요,라든지 당시 강릉에 흔하지 않던 아파트 놀이터에 놀러 갔다가 쫓겨날 때면 할머니 기다려야 해요, 집에 아무도 없거든요.라든지. 그러면 어른들은 미안해서라도 나에게 한 번의 친절을 더 베풀었다. 나는 그것이 나에 대한 관심이자 친절인 줄 알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동정을 이용하던 영악한 아이였을 뿐이다.

  

 그렇게 일곱 살이 될 무렵, 갑작스레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중앙시장 입구 근처의 한 가구 공방에 갔을 때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금은 볼 수도 없는, 당시 인테리어로 꽤 유행하던 짙은 갈색의 샷시문을 삐걱대며 열자 짙게 나던 오동나무 향, 여기저기 흩어진 매캐한 톱밥 냄새가 한데 뒤섞여 아주 오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여전히 나는 그때를 행복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아니 가족들에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갑작스레 받은 할머니의 신내림으로 신당을 짜러 가던 길이었으니.

 가난하지만 평범한 삶을 살던 할머니와 가족들에게 때아닌 날벼락이 아닐 수가 없었다. 특히나 미신 따위를 믿지 않는 아빠와 당시 사춘기 고등학생이었던 막내 삼촌의 반발이 굉장했다. 어미 없이 자란 딸, 거기에 무당의 손녀라는 꼬리표까지 붙일 수 없었던 아빠는 할머니를 설득해 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신내림이란 영역은 아빠처럼 미신을 믿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잘 알지 못하고.

 피 말리는 싸움의 끝은 신의 영역이라는 비과학적인 말과 함께 할머니를 설득하지도, 할머니가 거부할 수도 없게 신을 모시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결말뿐이었고, 할머니는 지금까지 27년째 굿당에 신을 모시고 있다.

 거기서부터였다, 나에 대한 동정이 동정 더하기 공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쟤네 할머니 무당이래. 같이 놀지마."

"무당이 뭐야, 엄마?"

"그런 게 있어, 너는 몰라도 돼. 하여튼 엄마가 놀지 말라면 놀지마."


 옥천 초등학교의 병설 유치원을 다닐 때에도, 그리고 그 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에도 엄마들의 수군거림은 꼭 나에게 들으라는 듯 전해졌다. 당시 옥천동은 지금과 다르게 매우 부흥하던 동네였다. 부잣집이 많이 산다기보다는 강릉 시내와 인접하고 당시에는 초등학교치고 꽤 큰 규모였기에 이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는 엄마들이 많았고 그만큼 치맛바람이 엄청나던 곳이기도 했다.

 어쩌다 한 번씩 보는 친척들과 이웃들에겐 동정의 대상이 되고, 학교에선 학부모들과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중적 잣대를 받던 나는 여러모로 심리적 불안감을 떠안고 살게 되었다. 서른셋이 된 지금도 그때 그들의 그 말과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날 만큼 괴로운 유년을 보냈다.

 그들이 내게 보인 친절이 동정이라는 것을 중학교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나는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내게 친근감을 보이며 다가서려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목적으로 다가오는 것인지, 내게 보이는 저 친절이 가식인지 진실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만들어 주었고 나는 다행히도 지금까지 친절과 가식을 잘못 구별한 적이 거의 없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나는 함부로 동정하는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늘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가 당신을 딱하고 가엾게 여긴다 한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동정으로 베푼 친절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동정으로 베푼 친절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가 여전히 날이 서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동정은 자기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포장하기 위함이라 여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동정을 경멸하는 '지안'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동훈'이라는 어른이 있다는 것 때문에. 현실을 살고 있는 나는 그런 어른을 아직 만나지 못했고, 내가 그런 어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다만 순간의 안타까움을 동정에서 친절로 포장하는 순간 나는 내가 역겨워하던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아 함부로 누군가를 동정하려 들지 않는다.

 세상엔 사연 없는 사람이 없으며 안타까운 현실을 사는 그들에게도 나름의 행복은 모두 존재한다. 나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데, 고되더라도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중인데 누군가 그런 나를 살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딱하고 불쌍히 여긴다면 나는 그것이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어른을 만나기 어려운 세상이다. 시대의 흐름이 그래서가 아니라 진짜 어른이란 것엔 기준이 없어서, 사람마다 동경하는 어른의 모습이 다 다르기에 누구를 진짜 어른이다 꼬집어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함부로 평가하고 동정하며 스스로를 괜찮은 어른이라고 여기는 못난 어른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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