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똥, 된장 찍먹 소믈리에입니다.
늙은 우리도 키자니아가 필요해
30대 초반부터 회사에 오래 다닐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래보였다. 그래서 직장선배들이 창업을 한다고 꼬실 때 덥석 물어보기도 하고, 프리랜서로 일을 해보기도 하고, 신생 조직에 들어가보기도 하고, 내 무덤을 내가 팠…아니 다양한 경험을 해봤다. 결국 고유의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산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기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손재주가 있나? 똥손 중의 똥손이다.
없는 걸 찾아헤매는 건 너무 비생산적인 것 같아서 그럼 뭘 가지고 태어났나 생각해봤다. 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 신체를 엄청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되게 좋은 것도 아니고..도대체 이걸 어디다 써..? 하다가 겨우 하나 찾은 것이 목소리였다. 말을 할 때 좋은 피드백을 많이 들었던 것 기억이 있었다. 또 어디서 들어보니 성대가 신체 부위 중에서 제일 나중에 늙는다네? 그럼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작은 보이스 트레이닝 학원이었다. 관리자가 될수록 말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얘랑도 얘기해야 하고, 쟤랑도 얘기해야 하고, 얘랑 쟤랑 같이 얘기해야 하고, 목이 너무 아파서 내가 말하는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서 찾아갔다. 한 10주 코스로 수업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내 말하기의 장단점을 알게 되고 꽤 재밌게 수업을 들었다. 여기서 그냥 끝냈어도 되는데…이 어리석은 인간은 다음 스텝을 밟는다.
그래도 나름 칭찬을 받으며 부업처럼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나는 성우학원을 찾아보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제일 늦게 늙는다며…그럼 나이들어서 작은 콘텐츠 나레이션이나 동화책 할머니 같은 일감이라도 받아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생각이었다. 당장 돈은 안되더라도 꾸준히 하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성우학원을 찾아가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4번 강의를 끊어놓고, 딱 한 번 가보고 바로 도망쳤다.
문제는 연기였다. 나는 그냥 정확한 발음과 듣기 좋은 음색으로 잘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연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EBS 공채나 애니메이션 성우를 지망하며 짱구 같은 목소리를 잘 내는 친구들이 잔뜩 있어 당황했다. 남의 연기를 보고 이미 동공이 흔들리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목소리가 차분하니 엄마 역할 같은 걸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미련 없이 도망쳤다.
아무튼 또 이렇게 인생에 쓸데없는 경험을 +1 추가했지만 오히려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이상 얼씬도 안하게 되어 머리가 시원했다. 다들 고민이 되는 것이 있다면 해보면 안다. 똥인지 된장인지.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똥된장 찍먹 소믈리에로 사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까? 인간의 수명이 너무 길어져서 이제 늙은 우리에게도 키자니아가 필요해진 건 아닐까.
260311 미솔랭가이드 : [미솔랭 직업탐색] 늙은 우리도 키자니아가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