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아무래도 우리는 잘 맞지 않은 것 같아. 부디 좋은 사람 만나길 바라! “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나보다 한참 어린 여자와 만나는 중이란다. 나랑 썸만 주야장천 타놓고는 도망가더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는데 조금 지나자 모든 세포들이 무너진 자존심을 복구하느라 부글부글 끓었고 나중에는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아아, 나도 어릴 때는 잘 나갔는데. 함박눈이 우박처럼 내리던 날 강남역 한 복판에서 '나는 도대체 왜 안 되는 거냐'며 멀쩡한 남자를 울부 짓게 만들었고 살면서 딱 세 번 흘린다는 사나이의 눈물 중 꼭 한 번은 나에게 쓰게 만들던 여자였는데. 이런 영광스러운 기억은 도대체 왜, 골반에 세긴 엑스의 이니셜처럼 피부에 박제되어 지워지질 않는 건지.
삶이 참 별로라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잘 나가던 과거가 현재의 머리채를 잡았다. 나도 꽤 괜찮던 시절이 있었다고, 현재의 구림의 근거를 대듯 자꾸 찬란했던 예전을 떠올렸다. 그래서 한동안은 늘어나는 숫자와 함께 줄어드는 인기를 통감하며 현실을 회피하거나 죄 없는 남자들을 싸잡아 욕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스스로 제 살길을 찾게 됐다고 할까. 하루하루 깊어가는 주름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술값을 아껴서라도 재빨리 피부과에 가는 것이 낫고, 돌아오지 않을 리즈시절을 그리워하며 통탄하기보다 젊음을 돌아오게 해 줄 스킨 보톡스라도 한 방 더 맞는 게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한 번은 오롯이 과거에 사는 남자를 만나 학을 뗀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대부분 과거형으로 기승전 '그때 내가-'로 시작해서 ‘- 그랬었지'로 끝이 났다. 그의 말은 대부분 허세와 과장을 교묘하게 섞어 놓은 과거형 시제였는데 나중에는 답답하고 안타깝기까지 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멋진 사람인데.
"주식해? 나 주식 좋아하거든"
"와, 주식 내가 옛날에 엄청 벌었지. 한 번에 일이억 쉽게 벌었어"
"운동 좋아해?"
"운동 마니아였지~ 나 매년 바디프로필 찍고 그랬어. 하루에 막 여섯 시간씩 운동하고 그랬다니까"
애정을 간신히 붙들고 있을 즈음, 결국 그에게 아웃을 외치게 된 사건이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갔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유난히 불친절했다. 조금 무서웠지만 별거 아닌 듯 넘겼는데 결국 일이 터졌다.
난투극은 '거 좀 얌전히 놓지'로 시작해 '이 색히가-'로 정점을 찍었고 그 시점을 계기로 과거 지향형 그는 나에게서 영영 과거가 되었다. 나는 피가 흐르는 그의 코를 막고 있던 휴지와 함께 그에게서 도망쳤다. 그 길로 나는 다시는, 절대로, 과거를 소환하며 현재를 정당화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현재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 굳이 과거까지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고 싶다. 과거의 내가 이렇게나 괜찮았다고 굳이 주석을 달지 않아도, 구구절절 역사서의 설명 없이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람이고 싶다. 누구에게나 리즈시절은 있으니까.
배우 정우성이 한 인터뷰에서 과거 조폭을 미화했던 영화에 출연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어린 친구들이 영화 속 그가 오토바이 타는 모습을 따라 하는 걸 보고 배우로서 전혀 영광스럽지 않았다고. 그 영화 이후 배우로서 경각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는 이제 조폭을 미화하는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는다.
과거는 말끔하게 보내주자. 나의 이전 버전이 어쨌든 우리는 하루하루 업그레이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전의 내가 얼마나 잘 나갔든, 지금의 내가 얼마나 시궁창이든, 나는 늘 오늘의 리즈를 새로고침 하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애쓰는 중이다.
어딜 가든 항산화제는 꼭 챙겨 먹고 하루 한 번 비타민과 영양제는 잊지 않고 욱여넣는다. 운동을 하더라도 힙업 운동을 잊지 않고 경락이 좋다면 경락을, 타이 마사지가 좋다면 타이 마사지를 쫓아다닌다. 도장 깨듯 피부과에 다니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각종 음원차트를 공부하듯 훑는다.
들어오는 소개팅은 마다하지 않고 가끔 데이트 어플도 슬쩍 켜본다. 당장은 아무런 수확이 없더라도, 단기적으로는 어린 친구들에게 밀릴지라도 그것이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대하는 정갈하고 예의 바른 마음가짐일 테니.
앞으로 만날 그도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과거에 갇히는 않고 내일을 맞이하는 사람이기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마스크 팩이나 한 장 붙이고 자야겠다. 내일은 덜 늙어야 하니까!
*배경 사진 Jenny, 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