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언니, 그때 그 오빠 어떻게 됐어요?”
“응? 누구? ”
“저번에 언니가 이야기했던 그분이요”
“아… 진즉에 까였지 뭐”
“와… 언니 그래도 대박. 어떻게 그렇게 용감해요?”
용감? 내가? 소심하면 둘째라면 서러운 내가 용감하다니. 그런데 이상하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고백이 쉽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어느 정도 지켜보다가 슬쩍 마음을 내비친다. 그리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되면, 고백한다. 이걸 용기라고 말한다면, 맞다.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나, 너 좋아해! 좋아한다고!"
…
뭐, 이런 걸 기대한 건 아니길 바란다.
그런 순수함은 서른아홉에겐 없다. 나의 고백은 그저 담백하고 심플하게 ‘자꾸 네가 신경 쓰이는데 너는 어때?’하고 물어보는 정도니까. 물론 다섯 번에 세 번은 실패로 끝나지만, 그래도 뭐, 어떤가. 이불킥 몇 번하고 쪽팔림에 혼자 끙끙 앓다가 얼마간 우울함에 허우적대며 술에 빠져 살면 금세 괜찮아진다. 최근 고백한 사람은 같은 모임에 있는 연하남이다. 그는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서로의 관심사도 비슷했으며, 대화도 매우 잘 통했다. 물론 보기 좋게 차이고 말았지만 말이다.
"누나는 더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그래야지! 너보다 훨씬 좋은 사람 만날 거다, 흥(웃음)“
쿨한 척 돌아섰지만 집에 가는 내내 마음이 쓰라리다 못해 목 안이 타들어갔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혼자 이불킥, 아니 핸들킥을 꽤 여러 번 했지 뭐야. 보시라, 이것이 쿨한 척하는, 연상 고백녀의 실체인 것을.
그러고 보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누가 나를 먼저 좋아해 주어야 내 맘도 시작됐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 먼저 고백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사랑은 대부분은 짝사랑으로 끝나거나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런 내가 먼저 고백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후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늘 수동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의 문턱 앞에는 평가원들 앞에 있었고, 직장에 들어갈 때도 면접관 앞에서 떨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늘 선택을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이 내 삶을 결정했고 나는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다. 타인에게 인생의 선택권을 넘겨주기란 얼마나 쉬운가.
‘자기 결정권’은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남들이 시키는 일이 하기 싫은 건, 본인이 청개구리기질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결정하고 의지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 즉, ‘자율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일 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반대로 주체가 되었을 때는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 실패를 보듬고, 괜찮다고 말하며 창피함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의 빈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내 고백이 쉬웠던 이유는,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절당한다 해도 몇 번 창피하고 말뿐 죽도록 후회하진 않을 테니까. 발만 동동 구르고 앉아서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기를, 고백해 주기를 기다리기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결정을 따르는데 익숙하다. 사회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고 순응하는 삶은 매우 쉽다. 하지만 쉬운 길은 때로 힘든 결말을 낳는다. 바쁜 하루에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슬플까. 그러니 부디, 내가 내 인생의 주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쉽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열심히 고백하고 차여보자. 남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기엔 나 자신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내가 결정하고 선택해야 중간에 길을 잃어도, 고장 나더라도 잠시 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간에 삐끗해도 목적지가 어디인지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 그것이 내가 차였을 때의 리스크를 감수하고도 먼저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물론, 앞으로도 수많은 이불킥이 예상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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