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싱이 좋은 이유
“한번 갔다 왔는데 괜찮아?”
“아니!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싱이라면 매몰차게 거절했건만. 나이가 들 수록 남자 보는 눈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연애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간의 경험을 핑계로 수많은 ‘안 돼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공감능력 떨어지면 안 돼, 너무 효자 안 돼’부터 나중에는 급기야 '눈웃음은 바람 기래, 두 번째 발가락 길면 복 없대' 등의 근거 없는 미신까지 추가됐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마흔에 가까워지니 오히려 이 모든 것들이 소용없어진다. 시장에서의 입지가 줄어드니 범위를 확장할 수밖에.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결국 더 관대해지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연하? 감사하죠”
“나이가 많다고? 괜찮아. 배 나오고 머리 벗어지고 그런 건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돌싱을 만나게 될 줄이야. 편견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아주 많았다. 이혼했다고 하면 분명 뭔가 큰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요즘 갔다 온 게 뭐 대수인가’하면서도 그 상대가 나 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야야, 아서라. 뭐 하러 돌싱을 만나. 됐어,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 그렇지?”
친구의 만류에 ‘그래, 내가 굳이 뭐 하러’ 하는 마음이 컸지만 원래 머리와 마음은 따로 노는 법.
원래 알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 잠시 만났던 사람. 하지만 우연히 그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 그는 돌싱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여자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마치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듯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한 타이밍에 매우 적절한 방법으로 제공했다.
나의 '여성 주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언제든 혼자 기다리게 하는 법이 없었다. 좀 늦나 싶으면 늘 먼저 와있었고 언제나 본인의 스케줄과 동선을 물어보기 전에 알려주었다.
이런 배려들을 일상인 듯 덤덤하게 해냈다. 능글맞거나 과함 없이 산뜻하고 담백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적당히 예의 바르고 단호하며 넘치지 않았다. 적절한 공감능력과 상황에 맞는 센스는 감탄할 만했다. 특히 무슨 일이든 빠르고 확실하게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한 번은 업체와 강사를 선정해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가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훌륭했다. 인원 모집부터 장소선정, 스케줄 조정, 업체 섭외까지 모든 일에 막힘이 없었다. 비교적 큰 행사였음에도 척척 해내는 그를 보고 신뢰가 갔다. 행사에 온 아이들을 대하는 일도 능숙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돌싱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크게 놀라지 않았다. 싱글이라기엔 여자를 너무 잘 알았고, 다방면에 능숙했으며, 여자들이 반할만한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혼자라면 게이거나 이혼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예상했으니.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른 이에게는 할 수 없었던 마음속 깊은 이야기가 그에게는 가능했다. 처음에는 '설마 내가 두 번째 와이프가 되겠어' 하는 마음에 경계심을 헐었고 나중에는 정말 그와 말하는 게 좋아서 얘기를 많이 했다.
쉽게 주눅 드는 성격이나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높은 면모,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성격, 자격지심 등 가까운 사람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 그 앞에서는 가능했다.
아픔이 있는 사람은 쉽게 통하기 마련이다. 그도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혼한 이유, 사업 실패, 냉랭한 가족관계 등 굳건해 보이기만 그도 아픈 구석이 많았다.
복숭아처럼 무른 사람이 단단한 상대를 만나면 물러지기보다 더 강해지기도 한다.
나보다 큰 일을 겪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은 듯 멋지게 사는 걸 보면 '그간 내가 엄살이 심했구나' 싶어서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만나며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바뀌었다. 그간 연애할 때의 번거로움이나 그로 인한 피로감, 지인을 통한 생생한 결혼 현실 고증 등으로 결혼을 나쁘게만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는 분명 이혼을 겪은 후 더 성장했다고 말했다. 결혼 생활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고 그래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결혼에 실패한 사람의 서사를 통해 결혼의 밝은 면을 봤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가 했던 말이 있다.
'결혼 그 자체는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다만 그 어려운 걸 둘이 어떻게 조율해 나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한 팀으로 잘 살아나갈지, 그게 중요한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후로 결혼이 누군가의 인성이나 성공의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혼 후로도 전처와 연락하며 지내는 그를 보고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지 뭐’ 하며 인생을 대하는 생각 자체가 가벼워졌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나(웃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돌싱에 대한 찬양이나 결혼에 대한 예찬이 아니다. 한 번 갔다 온 사람도 괜찮으니 만나보세요’ 라거나 ‘아직 못 갔으면 적당히 따지고 결혼하세요’하는 메시지도 아니다. 감히 결혼해 본 적 없는 내가 뭘 아냐고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를 통해 마음을 열고 그동안 보지 못한 것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과감한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열어 기회를 잡기 전에는 알 수 없던 것들.
갇혀 있던 생각을 버리고 눈을 들면, 더 많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이젠 정말 웬만한 상대는 다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의 특수성으로 인해 나의 결핍이 더 선명하고 느낌이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나는 더 큰 사람이 되었다. 그와는 결국 헤어졌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한 번 다녀와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