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erco en pipian | 돼지고기를 먹는 또 다른 방법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아침부터 날이 흐리네요. 금방이라도 후드득후드득 비가 떨어질 것 같아요. 장마가 지나고 나면 곧 뜨거운 여름의 나날이 시작되겠죠. 초등학생 때 여름방학이 지나고 키를 재보면 쑥 커있었던 기억이 나요. 이번 여름에는 얼마나 자라게 될까요.
알피가 지난 9월 말에 한국에 왔으니 아직 이 곳의 여름은 겪어보지 못했죠. 멕시코는 왠지 더 더울 것 같은 느낌이지만 사실 우리가 있었던 케레타로는 반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한국보다 뜨겁게 덥긴 해도 습도가 낮아요. 낮에 아무리 더워도 그늘 안에만 들어가면 급속도로 시원해지고, 해가 지면 가디건을 걸쳐야 할 정도로 서늘한 느낌이에요. 물론 같은 멕시코라도 지역에 따라 또 다르죠. 칸쿤은 한국만큼 찐하게 덥고 습하답니다. 크루즈를 타며 각 나라의 여름을 찾아다녔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여름을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네요.
오늘은 'Puerco en pipian'을 요리했던 며칠 전에 대해서 써보려고 해요. 사실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에는 호박씨 대신 땅콩이 들어가요. 그렇지만 지난주에 '땅콩소스를 얹은 닭'을 만들어먹었으니 아무래도 좀 질릴 것 같아서 호박씨로 대체했어요. 호박씨는 스페인어로 pepita (페피타)인데 그걸 소스로 만들면 pipian(피피안)이라고 부른대요. 귀엽죠? Puerco(푸에르코)는 돼지고기예요. 그러니까 '호박씨 소스를 얹은 돼지고기 요리'가 되겠습니다. 호박씨 소스라. '음.. 왠지 베지테리안 느낌이 담뿍 드는데.. 그게 돼지고기랑 어울리려나? 돼지고기는 자고로 고추장에 지글지글 볶아먹어야 맛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피가 또 누군가요. 발뮤다 토스터기가 죽은 빵도 살려낸다면 알피는 아마 죽은 돼지도 살려낼 거예요.
이 날은 월요일 저녁이었어요. 보통 밤 열 시까지 어학원 수업을 하는데 이 날은 여섯 시 수업부터 취소가 되어서 저녁을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죠. 프리랜서 강사에게 수업이 취소가 된다는 건 그만큼 수입도 적어진다는 뜻이니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수업이 꽉 차면 바쁘게 일하는 느낌이 좋고, 수업이 안 잡히는 날은 제가 좋아하는 다른 일들을 더 할 수 있으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거죠. 아무튼 오랜만에 다른 직장인들과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는 느낌은 신선했어요. 알피는 언제나처럼 지하철역에 마중 나와 있었어요. 점심으로 버섯 수프와 샐러드를 먹었더니 둘 다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양파와 고기만 사서 들어가기로 했죠.
호박씨가 오븐에서 구워지는 동안 나머지 소스가 될 재료들을 준비해요. 알피가 큐브 모양으로 고기를 써는 동안 저는 음악을 골라요. 이 날은 어쩐지 비틀즈였어요. 냄비에 물을 붓고 고기와 양파와 마늘을 함께 넣고 끓여요. (소금도 좀 넣어요) 앗, 호박씨가 다 구워졌네요. 오븐에서 트레이를 꺼냈는데 알피가 웃으며 말했어요.
"호박씨들이 다들 불평하고 있어"
귀를 기울여보니 트레이 위의 수많은 호박씨들이 작지만 다 함께 '치치치치'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어요. 하긴 얼마나 뜨거웠을까요. 호박씨를 창문 옆에 놓아두고 식히는 동안 비틀즈의 "Hey Jude"를 따라 불렀어요.
사실 이 레시피에서 가장 필요했던 건 '그린 토마토'였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꽈리 토마토(Tomatillo)'로 풋토마토와는 다른 품종이에요. 우리에게 익숙한 빨간 토마토보다 더 단단하고 새콤한 맛이 나서 살사를 만들기에 딱인데 우리나라에서 도통 구할 수가 없네요. 그러나 플랜 B는 늘 존재하는 법. 다행히 인터넷에서 Tomatillo로 만든 소스를 주문할 수 있었어요. 바로 헤르데즈 병에 들은 초록색 소스, Salsa Verde였지요. 다이애나 할머니께서 아시면 기겁하시겠지만 한국에는 꽈리 토마토가 없으니까요.
자, 이제 다 준비됐어요. 냄비에서 다 익은 양파와 마늘만 건져내요. 그리고 호박씨와 고수와 Salsa Verde와 함께 블랜더에 넣고 돌리는 거예요. 이때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하자면 청양고추를 두 개는 넣었어야 하는데 저희는 맵게 못 먹기 때문에 한 개만 넣었어요. 그리고 살사에 이미 매운 고추가 들어가 있기도 했고요. 이렇게 완성된 소스와 아까 익힌 돼지고기를 함께 넣고 좀 더 은근하게 끓이는 거예요.
저녁 식사가 완성되었어요.
색깔만 보면 시금치 커리가 떠오르지만 살사베르데의 매콤새콤한 맛과 호박씨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지는 특이한 맛이었어요. 돼지고기와도 잘 어울렸고요. 청양고추를 하나 더 넣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물론 레디메이드 소스대신 진짜 꽈리 토마토로 만들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죠.
이 날은 알피가 영화를 골랐어요. <Yesterday>. 비틀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만들었을 거예요. 알피에게는 아마 꽈리 토마토가 그럴 거예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시겠어요? 살사를 맛있게 만들어서 보답할게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