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파를 썰고, 난 글을 쓰고

Sopa de Puerros | 매우 보통의 대파 수프

by 제이조이



아침에는 흐렸던 하늘이 맑아져서 기분 좋은 오후예요. 게다가 오늘은 농협 앞에 장터가 열리는 금요일이에요. 알피는 떡을 좋아하지 않는데 지난주에 거기서 산 술떡을 먹어보고는 홀딱 반했거든요. 아, 떡을 왜 안 좋아하냐면요... 별 소득 없이 너무 오래 씹어야 해서 그렇대요. 웃긴 외국인이에요. 하긴 뭐 씹는다고 점점 달아지거나 육즙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술떡은 빵처럼 부드러운데 달달하니 맛있나 봐요. 그 술떡을 먹겠다고 금요일이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그래서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장터에 들러서 술떡 두 팩과 토마토와 사과, 그리고 바질을 사서 돌아왔어요.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술떡 한 팩을 해치웠어요. 그러고 나니 배가 약간 불러서 샐러드나 만들어먹을 생각이었지요. 냉장고를 탐색하다가 며칠 전에 사놓은 파 한 단이 그대로 있길래 파를 썰기 시작했어요. 칼질하는 소리만 들어도 심하게 아마추어스러웠는지 알피가 달려와서 칼을 제대로 잡는 법부터 가르쳐줬어요. 사실 그 전에도 한 다섯 번은 가르쳐줬던 것 같은데 알피는 늘 처음 알려주는 것처럼 상냥해요.


"그렇게 썰다간 네 손가락도 같이 썰고 말 거야"라고 하면서요. (이 말도 역시 다섯 번 이상 들은 것 같아요)


점점 어깨가 아파와서 남은 파를 알피에게 넘기고 누워버렸지요. 알피가 이어서 쓱쓱쓱 파를 썰기 시작했어요. 확실히 제가 썰 때랑은 소리부터가 다르네요. 알피는 보지도 않고 썰어요. 어둠 속에서 떡을 썰던 한석봉의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언제 한 번 불 끄고 대결을 해볼까 봐요. 알피는 파를 썰고 저는 글을 쓰고요. 파썰기를 끝낸 알피가 말했어요.


"오늘은 대파 수프(Sopa de Puerros)를 만들 거야"




Photo by Markus Spiske on Unsplash




크루즈에서 근무할 때 '감자 대파 크림수프(Potato leek soup)'는 많이 먹어봤어요. 감자와 대파의 궁합이 끝내줘서 제가 늘 좋아했던 메뉴예요. 그런데 오늘은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만들 거라서 감자와 크림이 빠지는 대신 계란이 두 개 들어가네요. 흠. 감자가 들어가지 않는다니 좀 아쉽지만 저는 늘 새로운 걸 시도해 볼 준비가 되어있으니 금방 신이 났어요.


먼저 계란을 삶아요. 다이애나 할머니는 완숙을 의미한 것 같은데 삶은 달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알피는 반숙으로 삶았어요. 그러고 나니 레시피대로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할 때 애를 먹었지요. 노른자는 미리 끓여둔 치킨스톡과 함께 블랜더에 갈고 흰자는 아주 잘게 썰어요. 알피가 현란한 칼질로 아주 가루가 될 때까지 썰었어요. "이상한 레시피야"라는 말을 반복하면서요.








냄비에 버터 2 테이블스푼과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썰어둔 파와 파슬리를 볶아요. 적당히 볶다가 남은 치킨스톡을 몽땅 부어요. 이때 알피가 흰자를 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겁보인 제가 멀찍이 팔만 뻗어서 기름이 끓는 냄비에 치킨스톡을 부었는데 쏴 하는 큰 소리에 또 잔뜩 겁을 먹었지요. 다행히 튀지 않아서 앞으로는 무서워하지 않고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블랜더에 노른자와 함께 갈아둔 치킨스톡을 마저 냄비에 부어요. 그리고 조금 더 끓이다가 흰자도 추가해요. 흠. 비주얼이 생각보다 별로예요. 알피는 맛이 없어 보인다며 이미 시큰둥해졌어요. 이건 그냥 대파 계란국이에요. 뭐 그래도 소금 간을 좀 더 하고 계속 끓이다 보니 배가 슬슬 고파와서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어요.







쿠르통을 올려야 하는데 대신 방금 만든 치아바타빵을 사 와서 살짝 바삭해지도록 올리브유와 마늘을 얹어서 구웠어요. 작게 잘라 수프 위에 얹어서 같이 떠먹으면 돼요. 아까 말했듯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대파 계란국이었어요. 특이한 게 있었다면 아까 파를 버터와 함께 볶았기 때문에 버터 맛이 고소하게 스며있다는 것 정도였어요. 알피가 "이건 만두가 빠진 만둣국 맛이야"라고 하길래 마침 냉동실에 있던 우리의 비상식량인 냉동만두를 구워서 같이 먹었지요.


분명히 배가 잔뜩 부른 상태로 글을 쓰러 카페에 왔는데 저녁 일곱 시인 지금 배에서 천둥이 치고 있어요.


저녁식사로는 좀 더 그럴듯한 걸 먹어야겠어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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