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는 비오는 날의 핫 초콜릿처럼

Como agua para chocolate

by 제이조이


하루 종일 비가 오네요. 우산을 들고 다니는 건 조금 성가신 일이지만 팔과 다리에 와 닿는 차가운 빗방울의 감촉이 나쁘진 않아요. 그렇지만 좀 추웠어요. 오늘 같은 날은 겉옷을 입었어야 했나 봐요. 전철역으로 마중 나온다는 알피에게 후드티를 하나 부탁했더니 샌들을 신은 아내를 위해 방수가 되는 운동화와 양말까지 챙겨 나왔어요. 따뜻해진 발로 함께 우산을 쓰고 집으로 걸어오면서 알피가 말했어요.


"푸에블라에서 살 때 이렇게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에는 늘 따뜻한 Chocolate con agua를 끓여먹곤 했어."



chocolate con agua



그 말을 들으니 따뜻한 핫 초콜릿 한 잔이 간절해졌어요. Agua는 물이고, Chocolate는 초콜릿이니 우리가 아는 '핫초코' 음료와 비슷해요. 한동안 더워서 생각이 안 났었는데 오늘 같은 날은 정말 딱이에요. 다행히 알피의 누나가 멕시코에서 가져왔던 초콜릿이 조금 남아있어요. 꺼내서 킁킁거리니 카카오 닙스 같은 시큼한 냄새가 나요. 바로 이거죠. 두툼한 초콜릿을 세 조각 꺼내 끓는 물에 잘 저어가며 녹여요. 그러다가 취향에 따라 우유를 조금 넣고 계속 끓이는 거죠. 우유를 넣은 핫 초콜릿은 Chocolate con leche라고 불러야 하지만 알피가 만드는 핫 초콜릿은 물 반 우유 반이예요. 벌써 제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Chocolate con agua 한 잔이 놓여 있어요. 달지도 않고 어딘가 구수한 맛이라 이 맛에 익숙해지면 일반 카페에서 파는 핫초코는 먹을 수가 없게 돼요.


그러고 보니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도 <Como agua para chocolate> 예요. 세계문학전집에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으로 번역된 멕시코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책이에요. 작년에 한 번 재밌게 읽고 이번에 다이애나 할머니 레시피를 요리하면서 다시 찬찬히 읽기 시작했어요. 소설적인 요소와 이야기와 레시피가 맛깔나게 버무려진 아주 깊은 멕시코 맛이 듬뿍 묻어나는 책이라 조금씩 아껴읽고 있어요.





"Como agua para chocolate가 무슨 뜻인지 알아?"


테이블 건너편에서 뜨거운 컵을 호호 불면서 알피가 물었어요.


"글쎄, 말 그대로.. 물과 초콜릿처럼?"


" It means they are perfect for eachother. (환상의 조합이라는 뜻이야)"


"아.. 물과 초콜릿처럼 잘 어울리는.. 그런 뜻이었구나"


"응. 와인과 치즈처럼. 또... 김치랑 밥처럼! 또... 감자튀김이랑 케첩처럼... 또..."


"너랑 나처럼!"


"네 맞아요"








그래서 저희의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말이죠. 저흰 나이도 같고 키도 비슷해요. 몸이 뻣뻣하고 춤을 못 추는 건 우리의 공통점인데 알피는 개의치 않고 휘젓고 다니는 반면에 소심한 전 제정신으로는 그러지 못해요. 위장이 약해서 매운 걸 못 먹고 술을 잘 못 마시는 것도 닮았어요. 결혼을 하고 나니 이렇게 입맛이 같은 게 참 다행이에요. 술을 잘 하진 않지만 와인 나잇은 우리가 가장 즐겨하는 어떤 의식 같은 거예요. 치즈와 견과류, 하몽, 과일 등을 예쁘게 플레이팅 해놓고 와인 한 병을 나눠마시며 행복해해요. 한 병을 다 마시는 날은 흔치 않지만 기분이 동하는 날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시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는 늘, 항상, 이야기를 나눠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 지금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의 꿈에 대해서요.



우리의 와인앤치즈 나잇



다른 점도 많아요. 알피는 제가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침착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거의 멕시칸 버전의 간디이자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말이 딱 맞아요. 그에 비해 저는 쉽게 푸드덕대고 제 기분을 구체적으로 말해서 방출하는 편이고요. 그렇지만 제가 가끔 못 본 척 넘어가는 것을 알피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옳은 일을 해요. 남이 버린 쓰레기를 대신 줍는다거나 역 주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는 노숙인에게 물 한 병을 사서 놓아준다거나 하는 일들이요. 써놓고 나니 저보단 알피가 좀 나은 사람 같네요. 전철역 코 앞에 살면서도 배차시간에 아주 딱 맞추어서 팝콘처럼 뛰쳐나가는 게 저의 일과이거든요. 그런 저의 머그컵에 찬 물을 약간 넣어서 혀를 데지 않고 차를 마시고 나갈 수 있게 배려해주는 세심한 알피 덕분에 사람답게 살고 있어요. 예전에 한 번은 알피가 공항에 드라이플라워를 들고 절 마중 나온 적이 있어요. 당장 다음날에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되어있는데 돌아오면 꽃이 다 죽어있을 테니까 아예 마른 꽃다발을 준비한 거예요. 뭐든지 코앞에 닥쳐서 후다닥 준비하는 저와는 종자가 다른 사람이에요.


Como agua para chocolate. 우리는 물과 초콜릿처럼 환상의 조합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대륙에서 태어나 플로리다에서 만나 이렇게 한국에서 멕시코 요리를 해 먹으며 살고 있어요. 알피가 만들어낸 요리로 교감하는 것들을 글을 통해 플레이팅 해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잔잔한 기쁨이예요.


그게 저희의 요즘 일상이에요. 비 오는 날의 핫 초콜릿처럼 따뜻하고 다정해요.




컵이 다 비었어요. 밤이 늦었네요. 설거지를 하고 자야겠어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Instagram @jogum_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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