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메이드 라드(Lard) 만들기
"돼지고기 비계가 필요해"
"그래? 정육점 가서 비계 있는 부분 달라고 하지 뭐"
"그게 아니라 비계 부분만 500g 정도?"
알피의 한국어가 많이 늘어서 간단한 질문을 스스로 하고 대답을 알아들을 정도가 되긴 했지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건 아직이에요. 그런데 궁금한 건 많아서 이것저것 계속 질문을 해요. 그러니 제가 중간에서 친절히 통역을 해주는 수밖에요. 이젠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말하는 게 익숙해요. 재밌기도 하고요. 그런데 가끔 길을 걷다가 괜찮은 자리에 공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한번 들어가서 여기 뭐가 들어오는지 물어보자느니, 카페 밖에 조명이 좀 과하게 켜져 있다고 낮에는 좀 끄는 게 어떠냐고 말하고 싶다느니 할 때는 솔직히 좀 귀찮아요. "니가 한국어 배워서 직접 물어봐"해버리는 거죠.
이번 '비계 구하기'도 마찬가지였어요.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를 위해 꼭 필요했거든요. 대형마트 정육점 코너에서 비계만 좀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팔지는 않는대요. 저는 뭘 부탁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상대방이 거절을 하면 두 번 다시 안 물어보는 편이에요. "그렇게는 안 판대. 딴 정육점 가보자"라고 했는데 알피는 그쪽 도마에 올려져 있는 고기를 가리키면서 저 부분에서 비계만 주면 안 되냐고 또 물어봐달라고 했어요.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어보면 될 일인데 저는 왜 그게 또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또 이 말이 나와버렸죠.
"아 니가 직접 물어보든가"
결국 그때 그 정육점에 갔어요. 알피가 돼지 등뼈를 구하러 갔다가 갈비를 사 왔던 바로 그곳이요. 정육점 사장님께서 미심쩍은 얼굴로 비계 500g을 잘라주셨어요. 지난번에는 살이 얼마 붙지도 않은 기다란 갈비뼈를 사 가더니 이번에는 또 비계만 찾는 희한한 커플이다 생각하실 만도 하죠. 어쨌거나 성공이에요.
집에 와서 알피는 허옇고 길쭉한 비계를 도마에 올려놓고 깍둑썰기를 시작했어요. 사실 알피가 정확히 뭘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저렇게 썰어놓고 얼렸다가 요리할 때마다 버터처럼 하나씩 쓰는 건가 보네' 하고 대충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알피가 오븐을 예열하며 말했어요.
"각오해. 이제 온 집안에 돼지 냄새가 날 거야"
아! 그러니까 비계를 구워서 기름을 짜내는 거였어요. 블로그를 찾아보니 프라이팬에 물을 자작하게 넣고 비계를 삶다가 낮은 불에 볶아서 기름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지만, 알피는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에 쓰여있는 대로 오븐을 택했어요. 그래야 타지 않는대요. 비계를 165도의 오븐에 넣고 2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꺼냈더니 벌써 기름이 자작하게 배어 나와있어요. 삼겹살 냄새가 진동을 한건 말할 것도 없고요. 기름을 스푼으로 살살 떠서 유리병에 담고 비계를 다시 오븐에 넣고 돌려요. 이제 7분마다 한 번씩 꺼내서 기름을 계속 떠내는 거예요.
어느덧 잼 사이즈의 유리병이 기름으로 찼어요. 이 기름이 바로 '라드'예요. 불순물이 없는 맑은 기름이에요. 돼지기름을 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누런 기름을 상상했는데 말이죠. 냉장고에 넣고 굳히면 뽀얗게 변하는데 예쁜 용기에 넣으면 소이캔들이라고 해도 다들 속을 것 같아요. 게다가 스푼으로 살짝 뜨면 얼마나 부드럽고 예쁘게 떠지는지 몰라요.
"동생한테 이거 캔들이라고 하고 줘볼까? 집안에 돼지 냄새나겠지?"
"불날걸?"
이 라드를 사용해서 처음으로 만든 닭요리 'Pollo en pipian rojo'에 대한 이야기도 곧 하게 되겠지요. 라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된 맛이 났거든요. 알피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멕시코의 맛'이라고 극찬했어요.
그나저나 돼지 냄새로 꽉 찬 집에서 7분에 한 번씩 일곱 번이나 비계 기름을 떠내는 건 한 번의 토요일로 족한 것 같아요. 그다지 로맨틱하진 않거든요. 나중에는 오븐에 들어가 있는 게 돼지인지 내가 돼지인지 모를 지경이 된다니까요. 참, 기름을 다 짜내고 바짝 마른 비계는 양념해서 맥주 안주로 먹어볼까 하다가 이게 뭐라고 먹나 싶어서 일단 냉동실에 넣어두었어요. 알피가 자꾸 시리얼 대신 제 아침 요거트에 넣어준다고 농담을 해요. 아무래도 그냥 버려야 할까 봐요.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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