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서른셋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경주에 다녀왔어요. 동대구로 향하는 기차의 바로 앞 좌석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타고 있었어요. 가방 안에서 야옹거리는 소리를 세 시간 동안 들으며 갔는데 고양이가 내리고 나니 덩치 큰 아저씨 두 분이 그 자리에 앉았어요. 뭐가 그렇게 재미나신지 박수까지 치며 크게 웃고 신나게 떠드는걸 바로 뒷좌석에서 들으며 알피가 말했어요.
"고양이 보고 싶어"
마당이 아름다웠던 조용한 한옥에서 머물었는데 숟가락 도어록 덕분에 내내 안전했지요. 도착한 날은 대릉원을 걸으며 나무들을 실컷 봤어요. 감나무, 잣나무, 배롱나무, 느릅나무, 소나무, 배나무... 여름의 짙푸른 생명력을 뿜어내는 나무들 덕분에 걸을수록 힘이 났어요. 다음 날에는 불국사에 갔는데 "깨달음과 어리석음은 하나이다"라고 쓰여있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그 느낌 그대로 마음에 와 닿았어요. 경주는 산, 들, 바람, 하늘, 개울 모두가 듬뿍 살아 숨 쉬고 있는 곳이에요.
경주에서의 마지막 날 밤, 한옥 마당에서 와인 한 병을 나눠마시며 이야기를 하다가 알피가 말했어요.
"우리에게 여행은 책갈피인 것 같아. 무슨 기억을 소환해내려고 할 때 그때가 치아파스 배낭여행 전이었는지, 알래스카에 간 후였는지, 시드니를 본 다음이었는지. 그런 식으로 기억을 더듬게 되거든. 넌 안 그래?"
"맞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삶의 챕터가 나누어지는 느낌이야.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도시인 경주를 느끼기 전과 후의 내가 같을 수는 없거든."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 경주라는 새로운 책갈피가 하나 더 추가된 거예요. 경주를 떠나오는 날 저는 만 서른셋이 되었어요. 나이를 먹어도 모험을 포기한 뚱뚱하고 게으른 고양이가 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떠나온 여행이었어요. 매일 창밖으로 보는 같은 풍경, 변하지 않는 이름의 지하철 역, 정기적으로 보는 사람들. 이런 일상이 있음에도 감사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잖아요. 그래야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고요. 삶의 보폭이 비슷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책갈피를 모으며 살아갈 거예요.
참, 2박 3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 앞에 택배 하나가 와있었어요. 바로 다이애나 할머니의 레시피 책이었어요. 이 책을 손에 넣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나 몰라요. 한 달도 더 전에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워서 바로 주문 버튼을 눌렀었죠.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한 주가 더 지났는데도 판매자가 주문을 확인한 것 같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확인할 것 같지 않았고요. 어쩔 수 없이 취소하고 같은 온라인 서점에서 일반 해외배송으로 다시 주문을 했죠. 그런데 현지 재고 부족으로 자동으로 주문이 취소가 되어버렸어요. 또 다른 온라인 서점을 통해 주문했는데 결과는 같았어요. 도무지 구할 수가 없는 듯했어요.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고 한번 더 주문하고는 까맣게 잊었죠. 그리고는 경주여행을 한껏 즐기고 있는데 띠링하고 문자 하나가 왔어요. <주문하신 책의 배송이 내일 완료됩니다>하는 문자였어요. 제가 얼마나 기뻤게요. 한 달 전에 주문하고 까맣게 잊은 책을 생일 선물로 받다니요.
경주의 푸릇함이 벌써 그리워요. 그렇지만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가다 보면 또 예쁜 책갈피 하나를 꽂을 날이 오겠죠.
요리할 때 가장 행복한 멕시코 남자와 맛있게 먹고 글 쓰는 게 세상 가장 즐거운 한국 여자가 함께 삽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다이애나 할머니의 멕시코 가정식 레시피를 매일 하나씩 만들어 감탄하며 먹고 기록합니다.
Recipes from Diana Kennedy X Alfie cooks & Jay 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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