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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Mar 28. 2022

그 시절의 일기검사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일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었을 거다. 엄마가 10권이 한 묶음이었던 노트 세트를 사 오시면 제일 먼저 일기장이 어떻게 생겼는지부터 꺼내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가장 애착을 가지고 매일 쓰는 공책이었으니 내 마음에 쏙 들어야만 했다.


줄에 맞추어 또박또박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내가 가장 기다렸던 건 선생님께서 내 일기를 확인하시고 밑에 달아주시는 코멘트였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신나게 한 이야기를 썼을 때는 "정말 재미있었겠구나! 자연이 웃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네" 하는 감상이 달려있기도 했고, 강아지를 못 키우게 하는 우리 아빠는 정말 성격이 더러운 것 같다고 썼을 때는 "속상했겠네. 그래도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하는 타이름, 길에서 구걸을 하는 두 다리가 없는 아저씨에게 주머니에 있던 500원을 주지 못하고 횡단보도를 건넌 일을 후회하는 일기에는 "자연이의 마음이 참 따뜻하구나!" 하는 따뜻한 칭찬이 페이지 구석에 빨간색 글씨로 달려있곤 했다. 선생님이 내 매일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시고 작고 세밀한 어른의 글씨로 정성스럽게 감상을 써주신다는 게 어찌나 즐거운 일이던지.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반장이 반 아이들의 일기 공책들을 한 아름 가져와 교탁에 탁 내려놓는 그때가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교탁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득달같이 내 일기장을 찾아 펼쳐보곤 했다. 그 순간은 늘 짜릿했다. 내가 생각해도 다른 날 보다는 품을 들여서 완성도를 높인 일기에는 가끔 반짝이는 별 스티커가 추가로 붙어있기도 했는데, 그러면 나는 다시 내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며 어떤 부분에서 선생님께서 감동을 받아 별을 붙여주셨을까를 한참 되짚어 생각했다. 어떤 문장에는 선생님께서 밑줄을 그어놓으시고 “파도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하는 코멘트를 달아주시기도 했다. 그런 날은 집에 오는 내내 그 문장을 생각했다. 뜨거운 여름을 맞으며 키가 쑥쑥 자라고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뛰놀아 피부가 탱글탱글하고 까맸던 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 시기에 연달아 담임을 맡으셨던 강선익 선생님은 나의 최초의 성실한 독자이셨다.


그 이후로 만난 담임 선생님들은 모두 말 그대로 '일기 검사'를 하셨다. 그냥 페이지 귀퉁이에 '검'이라고 쓰여있는 도장이 탕 찍혀있곤 했는데 그 마저도 어떤 때는 성의 없게 거꾸로 찍혀있기도 했다.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독자가 그다지 열렬해하지 않으니 쓰는 재미가 없었다. 대충 아무렇게나 갈겨써도 똑같은 '검' 도장이 찍혀있으니 나는 점점 일기 쓰는 일에 시들해졌다. 얼마 전에 이슬아 작가의 에세이 <부지런한 사랑>의 '일기검사' 부분을 읽다가 어쩜 나와 이렇게 똑같았는지 깜짝 놀라 예전에 써두었던 이 글을 찾아보았다.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에 흥미를 잃어 개인 비밀 일기장에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된 부분도, 그 시기도 비슷하다. 그리고 이슬아 작가의 말의 맞다. 그때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 나의 애독자가 있다는 것에서 오는 든든한 마음이 지금의 글쓰기에 밑천이 된 것이 확실하다.



2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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