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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Sep 25. 2016

어쩌다 보니 크루즈 승무원

세계지도가 가장 좋았던 어린 시절





사실 나도 내가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 세계를 누비는 크루즈에서 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낯을 하도 가려서 유치원도 제때 못 가고, 겁도 많은 편이라 지금도 못하는 것 투성이다. 사실 수영도 못한다. (그러나 구명조끼 입은 상태로 허우적거리는 정도만 된다면 크루즈에서 일하는데 아무 문제없다) 그렇지만 낯선 곳,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만큼은 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은일이 언니라고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며 한국에 이따금씩 들르던 동네 언니가 있었는데 멀리 떨어져 있으니 늘 같이 어울려 노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늘 고맙게도 이런저런 선물을 챙겨 오곤 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거의 50가지가 넘는 다양한 색상의 프랑스제 사인펜 세트였는데 내용물보다도 그냥 그 이국적인 느낌의 포장지와 거기서 나는 낯선 냄새에 제대로 꽂혀서 틈만 나면 킁킁 냄새를 맡았더랬다. 나중에는 집에 오래 두다 보니 그 냄새가 없어져서 어찌나 아쉽던지. 또 같이 딸려온 비닐봉지(프랑스어가 여기저기 적혀있었던, 뭔가 우리나라 검은 비닐 봉다리랑은 감촉이 달랐던)를 엄마가 버렸다고 울고불고 "엄마에겐 쓰레기처럼 보였겠지만 나에겐 소중한 비닐봉지였단 말이야"이래 가면서 찾아내라고 떼쓰다가 나중엔 두들겨 맞았던 기억. 그땐 딱히 '나도 프랑스에 가보고 싶다' 내지는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와 같은 구체적인 바람보다는 내가 모르는 낯선 세계에서 온 물건이 어떤 신기한 인연으로 내 방 안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던 아홉 살이었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생 때 참여했던 작은 대회였는데 취지가 지금 생각해도 꽤 괜찮았다. 그림 그리기, 글짓기부터 시작해서 모형비행기 만들기, 단어 퀴즈, 수학경시, 역사인물 이름 맞추기, 달리기, 멀리뛰기 등등 열몇 가지가 넘는 다양한 대회 종목을 만들어두고 학생들이 골라 도전할 수 있게 했다. 그 많은 종목 중 내 관심을 끌었던 건 나라 이름과 수도 외워서 맞추기였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체육이나 모형비행기, 무선 자동차 조립과 같은 대회에 참여했고, 공부 좀 한다 하는 애들은 수학경시대회나 영어퀴즈에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나라 이름과 수도 맞추기는 인기 종목에 끼지 못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인원이 참석했다. 왜 굳이 그 종목을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알고 싶었고, 알수록 더 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나라와 수도 이름을 외우면서 처음으로 궁금증을 가졌던 것 같다.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그 친구들도 내가 좋아하는 부루마블 같은 게임을 할까, 지구 반대편에 있으면 한국과 모든 게 다 반대일까, 그곳에는 바나나가 열리는 나무가 있을까 등등. 세계를 향한 나의 호기심은 작고 소박하지만 그렇게 시작되었다. 


크루즈에서 근무하는 4년 동안 37개국 68개 도시를 방문했다. 다녀온 곳을 긁어내는 재미가 쏠쏠한 스크래치맵. (비록 러시아 긁다가 팔이 빠지는 줄 알았지만)







원래 꿈은 하늘을 나는 스튜어디스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열심이었나 싶다. 전철을 타고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인천공항 카페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그때. 나의 꿈은 스튜어디스이었고 단 하나의 관심사는 '영어 잘 하는 것'이었다. 휴학을 하면서까지 영어에만 올인해봤고, 영문과에서 만난 몇몇 해외파 친구들의 유창한 영어에 자극을 받아 플로리다 디즈니월드에 인턴도 다녀왔다. 처음 가본 미국, 길거리에 즐비한 영어 표지판부터 모든 것이 신기하고 짜릿했던 시절. 이렇게 넓은 세상을 매일같이 여행하듯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 승무원이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면접 코칭도 다녀보고, 인터넷에서 무료 이미지 메이킹 상담 이벤트 홍보글을 보고 무작정 전철을 타고 김포공항에도 다녀오고, 면접 기회가 있으면 새벽같이 일어나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부지런히 쫒아다니던 스물다섯의 나. 사실 면접에서 비주얼의 비중을 무시할 수 없는 (특히 국내) 항공사 승무원에 도전하기엔 늘씬한 다른 친구들에 비해 키는 165 이하로 작은 편인 데다가 그렇다고 황금비율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살면서 키 작다, 살 빼라 소리는 못 들어봤는데 면접장에 들어가는 순간 연예인들 틈에 낀 일반인이 된 듯한 굴욕감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나마 이력서에서 내세울 만한 것을 찾자면 서울 4년제 대학을 나왔다는 것과 그동안 갈고닦은 영어실력이었는데 사실상 대학의 네임밸류가 중요한 직업이 아니었고, 영어 같은 경우는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인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상상 속의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는데 현실의 나는 평발에 맞지도 않는 힐을 신고 다니느라 다 까진 양쪽 발꿈치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안양역과 대학로를 오가는 승무원 지망생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땐 어리고 호기 넘쳤기에 가능했던 도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미국 크루즈사 한국인 승무원을 모집합니다 



모 외항사 최종면접에서 탈락하고 자신감이라고는 이미 땅을 파고 누운 연말, 집에서 귤이나 까먹으며 별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으로 몇 날 며칠을 보내던 중 크루즈 승무원 채용 공고에서 스크롤이 멈췄다. 크루즈 승무원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감이 안 왔지만, 플로리다 디즈니 인턴생활 당시 휴가를 얻어 마이애미 3박 4일 크루즈를 다녀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낯설진 않았고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운명처럼 느껴졌다면 과장이겠지만 정말 뭔가에 이끌리듯이 서류를 보내고 연락을 기다렸다. 1차 면접, 2차 스카이프 면접, 3차 전화 면접을 거친 뒤 드디어 합격 통보를 받고 나니 어느덧 2012년 새해가 되어 있었다. 그 해 4월, 뉴올리언스로 출국한 이후 37개국 68개 도시를 방문했고, 그때부터 이어진 크루즈에서의 삶은 또 다른 꿈의 시작이 되었다. 








키는 몇 이상 되어야 해요? 나이 제한은요? 관광학과 나와야 하나요?


주변에서 크루즈 승무원의 자격요건을 많이 궁금해한다. 승무원이라는 단어가 자동으로 연상시키는 항공승무원의 이미지 때문인지 외모를 많이 보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특정 학과를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받는다. 내가 몸담은 크루즈사의 경우에는 미국 회사여서 그런지 면접 때나 실제로 근무할 때나 외모나 나이가 걸림돌이 된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 승진의 기회도 마찬가지로 나이나 근무년수와 상관없이 업무수행능력에 기반한다. 게다가 나는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을 복수 전공한, 대한민국 취업전선에서 서류통과도 힘든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또 막상 크루즈에서 동료들과 이야기해보면 모두가 관광학이나 호텔경영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니 공부를 하면 도움은 되겠으나 필수적이진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크루즈 승무원은 서비스직인만큼 기회가 될 때마다 관련 아르바이트를 해볼 것을 권한다. 마이애미 본사 게스트 서비스 매니저와 파이널 인터뷰를 볼 때 받았던 단 하나의 질문은 "What do you think about a difference between Good Service and Great Service?"(좋은 서비스와 더 좋은 서비스의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니?)였다.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나 고민이 없으면 대답하기 힘들었을 질문이다.  


무엇보다도 어떤 자질이나 스펙에 앞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즐겁고 긍정적인 마음을 키우라는 작은 조언을 먼저 하고 싶다. 특히 사람을 만나고 부대끼는 게 좋다면 이만한 직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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