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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Sep 19. 2016

바다 위, 프런트 데스크의 하루

크루즈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날





첫눈, 첫사랑, 첫 돌, 첫 직장, 첫 월급...  


어떤 평범한 단어라도 '첫'이라는 접두사와 만나는 순간 특별해진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크루징을 했지만 나의 첫 크루즈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첫 크루즈



그나마 이게 제일 작은 사이즈라고 해서 받아온 사이즈 6짜리 이브닝 재킷은 어깨가 유난히 커서 꼭 럭비선수가 된 느낌이었다. 스커트는 말도 안 되게 길어서 허리춤에서 두 번 접어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어딘가 어정쩡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 교복을 어쩔 수 없이 빌려 입은 중 1이 된 것 같았다. 거울을 보니 옷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는 조그만 아시안 여자애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도착한 지 스무 시간도 안 되어서 안전 관련 트레이닝을 세 개나 받았고, 이제 프런트 데스크에 가서 진짜 업무를 배울 차례이다. 열다섯 시간의 비행으로 몸이 노곤하고 벌써 한쪽 볼에는 뾰루지 하나가 올라와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깨어있었다.



보이저 첫 승선 날. 긴 항해를 위한 로딩으로 바쁜 아침. 이 날의 공기와 소음, 두근거림은 잊혀지지 않는다.

첫 크루즈는 크루룸이 부족해서 운 좋게 게스트룸에서 지낼 수 있었다. 길고 크고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유니폼이었지만 교복을 입고 첫 등교하는 입학식처럼 설렜던 나의 첫 크루즈.




프런트 데스크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길게 늘어선 줄에 서있는 게스트들은 한 눈에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매니저가 분명히 다섯 시까지 프런트 데스크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어디서 매니저를 찾아야 할지 몰라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다짜고짜 내 팔을 잡더니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I didn't come to the cruise to spend my half day in this line. I want your manager right now." (내가 저 긴 줄에 서서 반나절을 보내려고 크루즈에 탄 줄 알아? 당장 매니저 불러줘)


'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찾는 그 매니저 저도 찾고 있어요..' 


아무리 주위를 휘휘 둘러보아도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모두가 바빠 보였다. 아주머니는 이제 어쩔 거냐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날 바라보고 있는 그때 나의 구원자 카르멘이 총총총 다가왔다. 


"Mam, please wait in the line to be served. I understand you are frustrated, however we cannot help you like this" (고객님, 죄송하지만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주십시오. 고객님이 화나신 건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이제 일 년 차라는 나의 트레이너 루마니아 여자 카르멘은 야무진 영어로 그러나 정중하게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잔뜩 부은 얼굴로 나를 한 번 바라보고 길게 늘어선 줄을 한 번 바라보고 카르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더니 중얼거리면서 줄 끝에 가서 섰다. 


도와줘서 고맙다는 내 인사에 카르멘이 말했다. 


"Oh, baby. I am sorry that this is your first day. Well, good luck" 

(오늘 같은 날이 너의 첫날이라니 유감이다. 뭐 어쨌거나 행운을 빌어) 


이 말을 남기고 카르멘은 줄에 서있는 게스트들을 돕기 위해 빠르게 사라졌다. 


알고 보니 그 날은 시즌 내내 캐리비안에서 규칙적인 일주일 단위의 크루즈만 하던 보이저호가 대서양을 건너 바르셀로나, 두바이, 싱가폴을 지나 상하이까지의 긴 여정을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대부분의 게스트가 미국인이었던 지난 몇 년과는 달리 전 세계에서 몰려든 다양한 국적의 게스트들을 상대하느라 크루즈 전 직원들은 바짝 긴장해있었다. 프런트 데스크만 해도 전화벨 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고,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북적거렸다. 처음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난 간단한 체크인, 체크아웃, 기항지 정보 안내 등 간단한 호텔 업무를 예상했었다. 사실 호텔에서 일을 해본 경험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크루즈에서의 프런트 데스크의 세계는 끝이 없었다.






바다 위의 리조트, 떠다니는 도시



                                                                                      사진출처: 구글, 로열캐리비안 웹사이트




1200개가 넘는 객실을 보유한 크루즈 배는 떠다니는 리조트 그 이상이다. 브로드웨이 쇼 버금가는 헤드라이너 쇼, 프로덕션 쇼가 매일 펼쳐지는 메인 극장. 매일 저녁 훌륭한 코스요리를 맛볼 수 있는 아름답고 거대한 다이닝룸. 취향에 따라 별도의 요금을 내고 선택할 수 있는 이국적인 레스토랑. 곳곳의 세련된 카페, 바, 라운지. 게다가 햇살을 가득 받으며 태닝을 즐기고 멋진 일몰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메인풀과 자쿠지, 아침마다 상쾌한 바다 공기를 들이마시며 달릴 수 있는 야외 조깅 트렉,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운동할 수 있는 헬스클럽, 마사지와 헤어, 네일, 페디큐어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스파, 암벽등반, 인공 서핑을 즐길 수 있는 플로라이더. 그럼에도 혹시라도 심심한 게스트가 있을까 봐 준비되어 있는 여러 가지 액티비티, 퍼레이드, 파티 등등.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바다에서의 며칠이 절대로 지루할 틈이 없다. 오히려 크루즈 여행을 좋아하는 진정한 멤버들은 일부러 긴 크루즈를 선택하여 배 안에서의 나날을 여유롭게 즐기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목적지까지의 여정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여행 방법이 아닐까.





모두의 Happy cruising을 위하여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 모든 정보를 훤하게 꿰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며, 여러 가지 컴플레인에 대한 회사의 방침, 게스트와의 커뮤니케이션 매너, 환전업무, 여러 기항지에 대한 정보, 특정 국가 출신 게스트에 대한 입국 관련 정보, 돌발상황 대처요령 등등 모든 것을 숙지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며칠간은 왔다 갔다 하며 마주치는 게스트들이 방향을 물어보면 지도를 꺼내 한참 들여다봐야 했다. 이렇게 나도 모르는 것이 많은 상태에서 게스트한테 질문을 받는 게 겁나고 스트레스였지만 좀 지나고 나니 모르는 건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고 도움을 구하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스본의 봄. 이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4년차.



"I am sorry sir, I just came onboard as a new hired, however if you allow me, I will definitely find the answer for you." 

"고객님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며칠 전에 신입으로 승선해서요. 그래도 고객님께서 허락해주시면 반드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말했을 때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는 게스트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의 게스트가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할아버지이시거나, 부모님 뻘 되시는 분들이라 오히려 지금까지 배 생활은 어떠냐, 어느 나라에서 왔냐, 집 그립진 않냐 등등 정답게 말을 걸어주시며 격려해주시곤 했다. 그래서 부족한 영어실력이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게스트와 소통할 수 있었고, 즐겁게 나의 첫 컨트렉을 마칠 수 있었다. 


사실 크루즈 여행에 낸 돈을 벌어가기라도 하려는 듯이 작은 것 하나하나 따지면서 말도 안 되는 보상을 요구하는 게스트들도 분명 있었고, 중요한 서류를 안 챙겨 와 나까지 골머리를 앓게 한 게스트들,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게스트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게 만약 큰 돈을 들여 일 년 넘게 계획하고 기대했던 나의 여행이라면 어땠을까 하고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전달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불끈 생긴다. 또한 고맙다는 말, 수고한다는 말, 일부러 들러서 커피나 초콜릿을 전달해주며 힘내라는 말을 해주는 대부분의 게스트들 덕분에 더욱 신바람 나게 일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잘 버틴 게 신기할 정도로 업무강도도 센 편이었고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안 받으래야 안 받을 수 없는 직업이긴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이기에 더 의미 있고 보람찼던 나날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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