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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Sep 30. 2016

미스컨시어지가 되다

즐거운 소통이 시작되는 바다 위 나의 라운지







그야말로 햇병아리 같았던 나의 첫 크루즈. 어느 날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는 우리와는 다른 유니폼을, 아니 수트를 차려입은 채로 분주하게 복사를 하고 있는 한 말끔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이라고 소개하며 포지션이 뭐냐는 내 물음에 "I am a concierge" (난 컨시어지야)라고 답했는데 생기기도 새침하게 생긴 데다가 어딘가 고고해 보이는 말투였다. 뭔가 늘 피곤에 절어있는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 뒤 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지나가는 게스트마다 모두 이 친구와 반갑게 포옹을 하고 볼에 키스를 하면서 인사하는 것이었다.






저 친구는 뭘 하길래 게스트들이랑 저렇게 다 친하지?



아직 영어에도, 업무에도 자신이 없어서 데스크에서 게스트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알아듣는 것부터가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이라 늘 바짝 긴장해 있던 나였다. 정말 솔직히 컴플레인을 하려고 긴 줄에 참을성 있게 서있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외국 게스트들을 보면 처음엔 도망가고 싶을 정도다. (디즈니월드에서 인턴생활을 할 때 미국인들의 질서와 참을성에 늘 감탄하곤 했는데,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해보면 더욱 실감하는 부분이다. 한국인의 경우 대체로 알아서 정보도 잘 찾을뿐더러, 큰 불만사항이 아닌 경우 삼십 분 줄을 기다리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이나 컴플레인을 어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경우 배에 라이브 음악이 더 필요한 것 같다는 의견을 말하기 위해 길고 긴 줄에서 40분을 기꺼이 투자한다) 같이 일하던 5년 차 터키 친구는 룸키를 교체하거나 환전 같은 간단한 일로 데스크에 온 게스트에게 절대 "How are you?"라는 질문 자체를 던지지 말라며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컴플레인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다나.


그런데 게스트들과 친구처럼 웃으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나에게 어떤 충격마저 주었다. 마치 호텔 지배인처럼 여유만만하면서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인간미까지 느껴진달까.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난 아직 아마추어 연기자였다.







컨시어지. I am in!





6개월간의 첫 컨트렉을 씩씩하게 잘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6주간의 꿀맛 같은 휴가를 즐겼다. 그리고 찬바람이 제법 불던 11월의 첫 주, 나는 호주에서 따뜻한 겨울을 즐기고 있는 보이저호로 돌아갔다. 시드니의 서큘러키에 정박 중이었던 보이저호는 오페라하우스를 마주 보고 있었다. 꿈만 같았다. 신입 티도 벗었고, 삼 천명이 넘는 호주 게스트들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매니저가 사무실로 오라는 호출을 보냈다. 이 아일랜드 출신 매니저 Keith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은 정말 정말 좋으나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억양을 구사하시는 분이었다. 못 알아들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온 신경 세포를 다 집중해서 들어도 나에겐 낯설기만 한 아이리쉬 발음과 억양. 가끔 전화 상으로 뭔가를 지시하는데 이건 알아들은 척할 수도 없고 난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 매니저와 일대일 면담이라니. 잔뜩 긴장하고 매니저실로 들어갔다.


“Are you ready to move on to the next step?” (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됐니?)


뜻밖의 질문이었다. 나 이제 두 번째 컨트렉 시작했는데 다음 단계라니. 나 또 못 알아들은 건가?

무슨 뜻인지 잘 몰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Keith를 쳐다보았다.


“I need somebody who can cover the concierge position. I think you will be phenomenal as a concierge. What do you think?” (컨시어지 포지션을 커버할 사람이 필요해. 내 생각에는 너 완전 잘할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그동안 말 못 알아듣는다고 몇 번 구박을 받은 지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는데 이건 또 칭찬이라고 딱딱 꽂히게 잘 들렸다. 이스라엘이 떠올랐다. 그가 일하던 9층 컨시어지 라운지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었다. 총 1400여 개의 방 중 38개의 스위트룸이 있는데 그 게스트들만 출입할 수 있는 특별한 라운지였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 푹신한 소파, 매일 다섯 시가 되면 시작하는 칵테일 아워, 서로 어울리면서 여유롭게 담소를 나누는 게스트들. 그리고 그들과 마주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스라엘. 아침부터 밤까지 북적북적 정신이 하나도 없는 프런트 데스크에 비하면 라운지는 설국열차의 맨 앞 칸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VIP 게스트만을 상대하는 중요한 키포지션에 아직 경험도 별로 없는 나를 먼저 고려해주었다는 게 참 고마웠고, 갑자기 없던 자신감이 마구마구 붙었다. 나는 단번에 말했다.


“I am in” (해볼게요)








Hello, Miss concierge
미스컨시어지가 되다



컨시어지/다이아몬드 라운지
라운지의 반이 통유리이기 때문에 파노라믹뷰를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스팟이 된다
오후 다섯시부터 여덟시, 칵테일아워에 제공되는 hors-d'oeuvres 셋업
바다 위 무한 토크쇼가 펼쳐지는 라운지 테라스




컨시어지로 포지션을 바꾸며 가장 좋았던 점은 Personalized service(개개인에게 맞춘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나의 업무 중 하나는 크루즈 일주일 전, 미리 게스트에게 스위트 서비스에 대해 설명하는 이메일을 보내서 내 소개를 하고 혹시 미리 알아둘 사항이나 도울 일이 있는지 체크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게스트들이 이메일에 감사하며 다양한 요청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오곤 한다. 레스토랑, 스파, 투어 예약 등은 기본이고 어린아이들 둘과 함께 여행하는데 아이들이 즐길만한 프로그램은 어떤 게 있는지, 베이비 시팅을 미리 예약할 수 있는지, 글루텐 프리 디저트 종류가 어떤 게 있는지, 극장에 휠체어 출입이 가능한지, 셰프라서 요리에 관심이 많은데 크루즈 안의 갤리를 둘러볼 수 있는지 등등.


프런트 데스크에서의 경험은 호텔 전체의 운영과 전반적인 지식을 배울 수 있었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많은 게스트를 상대하다 보니 회사 방침이나 한정된

자리 등을 이유로 때로는 게스트에게 NO라고 말해야 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크루즈에서의 식사는 여섯 시에 시작하는 메인 시팅과, 여덟 시 반에 시작하는 세컨드 시팅으로 나뉜다. 가족단위의 젊은 게스트가 많은 시즌의 경우는 식사시간을 나누는데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본격적으로 크루즈에 놀러 오시는 시즌에는 대부분의 게스트가 이른 저녁식사를 원하기 때문에 늘 골치였다. 크루즈를 예약할 때 선호사항을 요청할 수는 있지만 자리가 다 차고 나면 물리적으로 더 예약을 받을 수가 없는 게 현실. 매일매일 여섯 시 식사를 할 수 없다면 크루즈를 환불해달라고 우기는 화난 게스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심 어린 사과뿐이었다. (사실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는 정찬 식사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시간대 언제나 입장할 수 있는 뷔페도 가능하지만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삼 천명이 넘는 게스트가 크루즈에 타기 전, 이렇게 미리 예약이나 요청을 받는 컨시어지 서비스는 게스트에게도 편리하기 그지없지만 일하는 나도 신바람이 나게 한다. 또한 자주 보는 게스트와는 얼굴을 익히고 이름을 부르며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모두가 라운지를 방문하는 오후 다섯 시 칵테일 아워에는 나이와 국적에 상관없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깨알 같은 즐거움이다. 가장 좋은 이야기 상대는 단연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람 또는 Good listener이다.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며 관심을 가져주는 눈빛에 존중받는 기분이 들고 더 즐겁게 주거니 받거니 하게 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휴가는 신경 안 쓰고 모든 걸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며 불만토로 백분토론의 장을 만드는 게스트도 간혹 있긴 하다.


아무튼 참 세상은 넓고 사람들도, 사는 방법들도 다들 가지각색이다. 피터팬이 될 수 없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긍정적이고 따뜻한 어른이 되고 싶다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매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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