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nal de Amoles, Mexico
해발고도가 2300미터라는 조용한 산속 마을을 여행 중이었다.
울퉁불퉁하고 좁은 비포장도로를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는데 앞서 걸어가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90세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이 노인은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힘겨운 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한참 걸어야 뭐라도 나올 텐데..'하는 염려에 우린 차를 멈추고 창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어디 가세요? 모셔다 드릴까요?”
그러자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젊은이, 나는 오늘 몫의 운동을 해야 한다네”
노인의 말에 나는 부끄러워졌다.
나는 오늘 몫의 글을 쓰고 있는가.
그동안 나를 나아가게 했던 원동력의 팔 할은 ‘언젠가는 내 책을 내고 싶다’라는 막연한 꿈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내 속에는 탄생할 준비를 마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출간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단숨에 목차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4개월 동안 뭔가에 홀린 듯 집필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다시 같은 자리에 누워 잠드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생각의 서랍장을 열고 닫고 옮기고 비워내고 채워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머릿속 이 거대한 서랍장에는 100개도 넘는 작은 서랍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특이하게도 서랍 하나를 만족스럽게 채워 넣고 잘 닫으면 다른 한쪽의 서랍이 불쑥 튀어나와 열려버리곤 했다. 보통의 날에 나는 이 작업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맞지 않는 서랍을 억지로 밀어 넣다가 균열이 가거나, 어떤 날은 손잡이가 아예 빠져버리기도 했는데 그럴 땐 두통에 시달렸다.
나의 서랍 놀이는 작년 9월부터 그 해 말까지 계속되었다. 서랍장 안의 내용물들이 제 자리에 알맞은 무게와 색깔로 채워지자 워드 150장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마감일에 맞춰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4월, 에디터님께서 보내주신 교정본 파일은 완연한 책의 형태였는데 그때야 '책이 나오는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다.
책은 순조롭게 출간되었다.
그러나 작가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머무는 건 쉽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그 이후로 글을 쓰는 게 어려웠다. 정확히 말하면 뭔가를 쓰긴 썼으나 포스팅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지고 깊이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그러기에 난 부족하기만 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올 수 있는 여유로움과 삶의 깊이를 서른인 지금 당장 갖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내 글은 절뚝거리기 시작했고, 난 노트북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기도 했다.
와이파이는커녕 전화도 되지 않는다는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외부와의 소통이 불가능해지니 내면에서 더 많은 말을 걸어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떤 감격에 여러 번 목울대가 뜨거워지며 울컥 해지려는 걸 참아야 했다. 세계가 하늘과 숲으로만 가득 차있는 것을 보았을 때가 그랬고, 안또니아 아주머니가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 걸 도와주실 때가 그랬다. 불꽃이 벽난로 안을 서서히 밝히며 전해지는 따스함.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마음이 편안해지는 냄새.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고 한없이 사랑하게 되는 순간.
모두가 제자리에 있었다.
하늘과 숲과 바람. 장작과 불꽃. 밤하늘에 흩뿌려진 별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난 ‘이거면 충분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숲이 말했다.
"너도 충분해. 네 존재만으로도 충분해"
오늘 몫의 운동을 하는 중이라는 노인을 뒤로하며 나는 말없는 응원과 위로를 보냈다.
느리게 걸어도 괜찮다고.
오늘 몫의 삶을 정성껏 살아내면 된다고.
그거면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