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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자연 Jan 31. 2019

언젠가 또 만날 우리는

바다 여행자 롤랜드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크루즈에서 만나는 수많은 게스트들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모두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순간에 특정 사람이 딱 떠오를 때가 종종 있다. 그래 봤자 딱히 연락처를 주고받은 게 아니니 '잘 지내시나?' 잠시 생각하고 추억하는 게 다이지만. 신기한 건 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게스트는 가까운 시일 또는 몇 주 내에 꼭 다시 만나곤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분들은 대부분 돈과 시간의 여유만 생기면 크루즈로 직행하시는 크루즈 마니아들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긴 하다. 어쨌거나 집 떠나 일하면서 부모님처럼, 또는 친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정다웠던 사람이 몇 년 후 예고 없이 내 앞에 선물처럼 다시 나타나 따뜻하게 포옹을 하는 순간은 언제나 놀랍고 즐겁다.








그 날은 조용한 라운지에서 장기 투숙객인 데이빗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데이빗 아저씨는 아내 콜린과 함께 두 달째 크루즈 여행 중이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입담까지 좋은 이상적인 대화 상대였다. 그는 멤버십으로 따지면 최고 레벨인 '피너클 클럽' 멤버였고, 나는 그런 멤버들을 담당하는 컨시어지이다 보니 서로 아는 사람들이 많이 겹쳤다. 각자의 이야기는 이미 두 달 동안 다 했겠다, 우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시카고에서 온 존과 수잔 부부 알아? 그 있잖아 존은 키가 크고 수잔은 긴 머리를 늘 땋고 다니고."

"아 맞아요! 알아요. 그분들 플로리다에서 만났던 것 같은데, 아직 건강하시죠?"

"그럼. 그 사람들이야 워낙에 운동도 열심히 하니까. 크루즈와서도 아침마다 조깅하잖아. 그럼 알렌도 만난 적 있겠네? 늘 혼자 여행하면서 스위트룸에서만 묵는 양반 있잖아"

"아 그럼요. 알렌 아저씨 여러 번 만났죠. 이 배에 마지막으로 타셨던 게 작년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디 계시려나"


뭐 이런 식의 대화였다. 그때 갑자기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으니 롤랜드 할아버지였다. 그분도 데이빗만큼이나 크루징을 즐기시는 멤버 중의 멤버라 왠지 서로 알 것 같았다. 내가 묻자 데이빗은 잠시 생각하더니 분주하게 스마트폰 사진첩의 폴더를 들락날락했다. 이내 그는 사진 하나를 찾아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이 롤랜드?"

"맞아요! 데이빗! 진짜 모르는 사람이 없네요. 저 이 할아버지 진짜 좋아했는데요"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데이빗의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이 분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어. 나도 잘 아는 사이는 아니고 한 번 정도 만났던 것 같아."








사실 그런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크루즈에 있는 동안 각별하게 친했던 할머니 할아버지 멤버분들과 작별할 때는 언제나 마음이 조금 시리기 마련이다.


롤렌드 할아버지와는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고 크루즈에서 몇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그의 부고에 나는 며칠 동안 울적했다. 벨기에 출신이지만 스페인에서 살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분이었다. 유명한 사진작가인 딸이 하나 있고, 또 다른 딸은 이태리 출신 남자와 결혼해서 영국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두 손녀가 있는데 엄마와 할아버지 덕분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알고, 아빠로부터 이태리어를 배우고, 프랑스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불어도 할 줄 알고, 사는 곳은 영국이니 영어는 기본이라고 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롤랜드 할아버지는 커다랗고 둥그런 눈을 껌뻑거리며 조근조근 이야기해주었다. 유럽 억양이 묻어나는 그의 영어는 그의 하얀 머릿결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혼자였고, 어쩌다 무리 안에 있어도 조용했다. 크지 않은 키에 둥그런 어깨. 숱이 많은 하얀 머리칼.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네모진 금색 안경테, 골똘하게 생각하는 표정. 신나서 웃으며 이야기할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던 사람.


그를 이제 크루즈에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몰랐다면, 이 소식을 전해 듣지 않았다면, 늘 그렇듯이 여행하며 흘러가듯 살아가고 있겠지, 언젠가 또 만나겠지 하는 무심한 기대 속에 살았을 텐데. 그의 부고를 듣고 다시는 그를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참 이상하다.



Salute, Roland. 바다여행은 할 만큼 하셨으니 하늘 여행을 떠나신 거겠죠.

가끔씩 생각날 거예요.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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