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요즘 내가 배우고 싶은 분야의 검증된 튜터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앱을 알게 되어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벌써 수업을 두 개나 신청했는데 그중 하나는 늘 로망이었던 여행 펜 드로잉 수업이다. 비슷한 내용의 여러 수업이 있었지만 리뷰를 보니 특히 이 튜터님이 칭찬을 많이 해주신다길래 주저 없이 선택했다. 학창 시절 나름 모범생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다닐 학교가 없다 보니 칭찬에 목말라있었나 보다. 매주 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3주. 장소는 합정의 조용한 카페. 콜!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튜터님은 첫인상이 차분하고 말을 조곤조곤 예쁘게 하시는 분이었다. 게다가 깨알 같은 급식체를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하셔서 유행에 뒤쳐지는 나를 위해 본의 아니게 (그러나 기꺼이) 급식체 강의까지 병행해주셨다.
원래 그룹수업이라 한 분이 더 오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대일 수업이 되었다. 튜터님은 깔끔하게 코팅을 한 이론 내용을 한 장씩 넘기며 보여주셨다. 첫 페이지에는 네 개의 입체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지구본처럼 동그란 구, 피라미드 모양의 삼각뿔, 원통, 그리고 원뿔.
빛과 명암, 그림자에 대한 간단한 이론을 상냥하게 설명해 주신 튜터님은 손가락 하나를 쭉 내밀며 물으셨다. “제 검지 손가락을 그린다고 하면 이 도형 네 개 중에서 뭐랑 제일 가까울까요?” 난 원통 모양을 골랐다. 리뷰에 쓰여있던 대로 튜터님은 나를 열렬히 칭찬해주셨다. “맞아요! 원통이랑 제일 비슷하죠! 원통 위에 구의 반을 씌운 것과도 같고요. 주변의 사물을 잘 관찰해보세요. 복잡한 모양 같아도 단순화시켜보면 대부분 이 네 개 중 하나 또는 몇 가지를 합친 것과 비슷하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두 시간 수업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집에 돌아오며 나는 새삼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전철의 손잡이. 음. 저건 길쭉한 원통 세 개를 납작하게 만들어 붙여놓은 거군. 버스. 저건 단순한 직육면체잖아? 카페의 의자. 저건 얇고 납작한 직육면체에 가느다란 원통 여섯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붙어있고 앉을 수 있게 편평하고 납작한 직육면체와 연결되어 원통으로 된 다리 네 개로 중심을 잡는 식이군.
사실 요즘 머리는 복잡하고 속도 시끄럽다. 크루즈와 작별을 고하고 혼자 뭘 해보겠다며 한 몇 주 신나게 덤벼들었는데 지금 약간 땅굴로 파고드는 나날이 나흘 정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아니 기세 등등하다가 왜 자고 일어나니 겁쟁이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열등감 패배감 등신감 뭐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김 빠지고 얼음이 다 녹아 맹맹해진 콜라 같긴 하다. 게다가 지난주에 굴짬뽕을 먹고 아주 제대로 체했는데 그 여파가 꽤 오래가서 소화기관도 약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날씨가 풀려서 그런지 기분이 살짝 나아져서 도서관에서 책을 골라 좋아하는 카페에 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카페 문짝을 보며 저것도 직육면체군 하고 중얼거리다가 내 이지러진 마음도 잘 주워 담아 조금 떨어져서 관찰해보면 원뿔이나 직육면체 같은 모양일 거라고. 다 비슷비슷한 고민 하면서 사는 거지 뭐 나만 그런 거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러고 나니 비로소 해장한 듯 속이 풀렸다.
두 시간에 3만 원짜리 드로잉 수업인데 심리치료까지 받은 느낌이다. 다음 수업에서는 튜터님께 조각 케이크라도 사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