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매월 이 날만큼은 조심하세요.
에~ 팀장님,
오늘 음력 초하루(lunar first day)인 걸 까먹었어요.
오늘 결과 발표를 해도 괜찮을까요?
안 그래도 더워지는 날씨에
미즈짱의 '음력 초하루' 같은 단어는
나의 정신을 더욱 혼미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쇼핑몰에 입점할 최종 테넌트를 선정하기 위해
입점 희망 업체들에 공개 입찰 설명회를 진행하였고
지난주까지 몇 가지 운영계획서를 제출토록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사전에 안내된 '최종 결과 발표일'인 것이다.
선정된 업체에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날이 되겠지만
혹여 떨어진 업체에는 이 날이 '음력 초하루'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지 않냐는 게,
미즈짱의 걱정이었다.
'아니 그럼 이걸 왜 이제야 말하나'
출근하기도 전에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낸 미즈짱을 향해
원망 섞인 생각도 들었고
미즈짱이 저렇게 다급하게 말할 정도면
정말 크리티컬 한 '문화적 결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결과는 안내된 대로 오늘 발표할 거야, 미즈짱
이라고 세상 쿨한 척 답을 했다.
계획서를 열심히 제출한 만큼
오늘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파트너사들에게
발표 지연이 더 큰 결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선정에서 떨어진 파트너사들에게는
이번 공개 입찰(Public Bidding)에 떨어진 사유에 대해
사전에 안내된 각 평가요소별로 어떤 부분이
우리가 추구하는 바와 맞지 않았는지,
명확하고 세부적인 근거를 들어 장문의 레터(Letter)를 직접 보냈다.
선정업체에는 간결하게
최종 파트너사로 선정되었음을 기쁘게 알린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평소 미즈짱이 나를 참조에 넣어
파트너사의 실무자들에게 보내던 이메일에는
칼같이 '잘 받았다' 또는
'시간 내에 회신하겠다' 등의 답장을 받았는데
내가 손수 보낸 이메일에는 아무도 응답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개경쟁에서 선정이 된 업체도 말이다!
역시 오늘 초하룻날이라
다들 중요한 발언을 신중하게 하려는 것 같아요
이쯤 되니,
미즈짱의 인사 카드를 다시금 열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생, 하노이 출생"
아니 이 어린 친구가 왜 이렇게
미신에 집착한단 말인가!
내가 한국에서 살면서
1월 1일 또는 양력 첫날이라고
조심하는 사람은 봤어도
음력 1일이라고 조심하는 사람은 보질 못했다.
아, 추석이나 설날 같은 날은 예외다.
미즈짱은 지난달에도 내가,
피드백이 없는 업체 사장님께
연락해서 답을 받으라고 했더니,
오늘은 음력 초하루라
그를 귀찮게 하지 않고 놔두는 게 날 것이라며,
나를 당황시킨 적이 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일은 언제 하나
매월 공휴일 떼고, 음력 초하루 떼고,
그럼 일은 언제 한단 말인가.
미즈짱의 개인적인 종교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켜보니 우리 팀의 새로 온 미즈홍도
오늘 초하루라고 '비건식(채식)'으로
도시락을 싸왔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베트남은 공산주의 나라 특성상
교회, 성당, 절 등 특정 종교의 건물이나 그들의 활동이
한국에 비해 눈에 띄게 활발하진 않지만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는
여러 가지 종교와 타 문화가 녹아 있는 것을
종종 느끼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일식집의 계산대 앞에서
볼 수 있는 '마네키네코' 장식품을
베트남에서는 식당 중 거의 열에 여섯, 일곱 집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문화라는 것보다,
돈을 불러다 주는 '복고양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은
잦은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타 문화에 개방적이고
이를 기존의 문화에 빨리 흡수하고 융합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음력 사흘 째 되는 날,
선정에 탈락했던 파트너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결과에 승복하며
다음 기회에 꼭 함께 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이를 본 미즈짱이 또 이렇게 말했다.
역시, 음력 초하루에는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