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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30. 2015

뉘른베르크, 아름다운 노을의 도시

자랑스러운 독일인의 높은 긍지와 사려 깊고 올바른 마음

아름다운 노을의 도시 

(뉘른베르크, 카이저부르크, 뉘른베르크 박물관, 뉘른베르크 성)


여행자는 어디서든 잘 잔다. 어제는 무려 12시간을 잤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나는 버스, 기차, 길에서도 잘 자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며칠씩 잠 못 들던 예민한 나는 어디로 간 건지 요즘은 그냥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든다. 


그런데 나 뿐만 아니라 토마스와 키텔도 어찌나 늦잠을 자던 지, 내가 남자 두 명이서 자는 방을 벌컥 열고 소리쳐 깨운 적도 적지 않다. 역시 나는 이들의 큰 누나인 것이다. 

토마스의 여자친구이자 의사 ‘리나’는 우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우리 중에 또 가장 큰 누나가 되어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래 가지고 혜림도 키텔도 앞으로 여행 잘 다니겠어? 토마스너도 아직 잠 오는구나!”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시리얼과 프리첼을 입에 집어 넣으며 피식 피식 짓궂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날 우리는 리나의 추천을 받아 뉘른베르크를 가기로 했다. 히틀러가 가장 사랑했다는 아름다운 도시로 이름 높은, 한편으론 뉘른베르크의 재판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린 도시 뉘른베르크. 워낙 전경이 아름답고 노을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많이들 었던 지라 예전부터 무척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허나 요 며칠 우리는 계획 없이 늦잠을 자기도 하고 갑자기 일정을 바꾸는 등 돌발행동을 이어왔기 때문에 도대체 언제 뉘른베르크를  가보지?라고 조금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리나! 최고!!!”

큰 누나처럼 호령하는 리나 덕분에 우리 개구쟁이들은 급히 가방을 둘러메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리나는 오늘도 병원 근무 스케줄이 있어 우리와 함께하지 못했다. 우리는 급히 작별인사를 하고 어제보다 뜨거운 햇빛에 두 눈을 가리며 IC를 타러 역으로 갔다. 다음 기차가 불과 1분 후 출발이란 싸인을 보자마자 토마스는 우리에게 어서 달리라고 소리친다. 우당탕탕 쿵쿵쿵, 커다란 짐 박스라도 계단에 떨어뜨린 듯 우리는 요란스레 계단을 뛰어 올라 겨우 IC에 탑승했다. 


“오늘 우리가 갈 곳은 뉘른베르크에서도 뉘른베르크의 재판이 열린 곳으로 갈 거야. 지금 거긴 박물관이 되었거든. 역사적 의미가 크기도 하고 콘텐츠도 너무 좋아서 리나가 너희 데리고 꼭 가라고 추천했어.” 

우리는 뉘른베르크에 도착해 기차를 한번 더 갈아 탄 후에야 뉘른베르크 재판 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자료가 독일어로 되어 있고 영어 설명 조차 없다. 급히 오디오 가이드를 빌리러 내려가는 나를 붙잡은 토마스는 자신이  설명해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키텔이 독일 역사에 대해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호, 나 오늘 훌륭한 가이드 두 명을 고용했는 걸? 오늘 수고해줘요, 가이드님들!”



독일인인 토마스가 이 곳의 역사와 나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그들의 잘못과 끔찍한 과거, 그 역사에 대해 뉘우치고 세계에 사죄를 구하는 독일인들. 자신들의 잘못을 세상에 알리고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고쳐갈 수 있는 것이라 믿는 성숙한 독일인들. 나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난 독일인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많은 나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역사를 감추거나, 왜곡하거나, 묵인하고 있어. 하지만 독일은 그것에 대해 사과하고 고치려 하니 감동적이고 존경스러워.”


“아냐. 이게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숙명인걸.”


‘숙명’ 그의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고 그게 엄청나게 깨끗한 짐 심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많은 독일인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 뒤로 우르르 들어오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보니 왠지 마음이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표정이 보이자 토마스와 키텔은 등을 돌려 뒤를 바라본다. 나는 조용히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기념관을 나와 뉘른베르크 시내를 돌아다녔다. 아름답고 작은 이 동네는 뮌헨만큼 활기차고 로텐부르크만큼 사랑스럽다.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만연하고 나의 입은 이미 귀에 걸린지 오래였다. 우리가 늦잠을 자고 늦장을 부리며 움직인 게 하늘에서 티가 난다. 길고 긴 독일의 여름 낮이 어느새  반쯤 기울어져 있다. 우리는 길 거리에서 사과를 사 한쪽 씩 나눠먹곤 카이저부르크 성벽을 구경하기 위해 오르막길을 걸어 올랐다. 


“으악, 너무 힘들어!” 

내가 아니다. 토마스와 키텔이다. 

“다 큰 청년들이 이 정도 언덕 가지고  힘들어하면 어쩌자는 거야! 어서 일어나!” 

더운 날씨에 땀으로 흥건해진 얼굴을 닦으며 나는 그들을 닦달했다. 하지만 둘은 바닥에 큰 대자를 그려가며 드러누웠고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옆자리에 주저 앉았다. 

“나도 참 체력이 별론대, 너넨 진짜 최악이구만. 토마스 넌 공부만 하지 말고 운동 쫌 해! 키텔 너도 독일 여행 계속해야 한다며, 어서 적응해야지!” 



나의 잔소리에 꼬마처럼 귀를 막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두 남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기 문 너머로 보이는 성벽으로 달려간다. 무척 가까워 보였는데 꽤 거리가 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부여잡고, 한 손으로 한 다리를 들어 옮기듯 느릿 느릿 길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둘은 아직도 바닥에 누워있다. 


저 멀리 성벽 너머로 진달래 빛 고운 노을이 번져간다. 저 노을을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잠이 들 때 이불처럼 몸을 덮으면 언제나 분홍빛 곱고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다. 노을은 어느새 성벽 위에 걸쳐져 마치 비행기를 타다 신비로운 분홍빛 구름을 마주한 느낌이다. 나는 성벽 끝에 서 도시를 내려 보았다. 


“어잇!”

순간 토마스와 키텔이 나의 등을 치며 소리친다. 놀란 토끼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노을이 담긴 그들의 눈과 양볼이 예쁘게, 수줍게 물들었다. 그들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매우 든든하다. 

“감상에 빠졌구나-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서 맥주 한잔 하자!” 

“응!” 


우리는 노을을 등에 업고, 이 도시를 감싸는 성벽에 인사를 했다. 옆에서 들려오는 거리의 악사의 목소리가 성벽을 다 내려올 때 까지 귓 가에 들리는  듯했다. 



가파른 언덕에 자리한 펍에 들러 이 펍에서 유명한 베리맥주와 맥주를 사 바닥에 앉았다. 오늘 꽤 피곤했던지 알레르기 기운까지 있던 나는 바닥에 앉아 커다란 동상에 몸을  기대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분이 흘렀을까, 잠에서 깨고 보니 어느샌가 도착한 토마스의 학교 친구 다비드가 토마스, 키텔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며 옆에 놓아 두었던 맥주를 다시 집어 목을 축인다.  


“혹시, 한국분이세요?”

갑자기 들려오는 한국인의 목소리에 미어캣처럼 방어태세를 갖추고 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바른 자세를 잡는다. 

“네, 한국 사람 맞아요!”

“저기 그냥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기 왜 다들 길 바닥에 앉아 있어요? 그것도 엄청 가파른 언덕이잖아요. 무슨 공연 있나요?”

순간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 사람들 죄다 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여긴 다들 술을 이렇게 마시네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그녀가 떠나고 옆에 친구들이 나에게 한국 사람이었느냐고,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묻는다. 

“너네 희한하다고, 그  이야기했어.” 

어리둥절한 표정의 세 사람의 표정을 보며 나는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오늘도 참 잘 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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