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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30. 2015

에를랑겐, 몽상가들의 하루

독일의 소소하고 따뜻한 대학도시 에를랑겐


몽상가들로 가득 찬 에를랑겐에서의 하루


여행을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다. 바로  ‘공원’.

햇살이 조각조각 부서져 별가루처럼 떨어지면 풀밭에 조금 남아 있던 아침 이슬들이 파르르 몸을 떨며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는 곳. 그 곳에 누워 잠을 자고,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어린 시절 유럽여행 사진이라고 소개된 사진을 볼 때면 그 어떤 건축물보다 마음을 붙잡아 그 곳에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게 한 장소이다. 

오늘도 다행스럽게 날이 밝은 아침이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햄과 살라미, 치즈와 버터를 꾸덕하게 바른 빵으로 샌드위치를 조립했다. 조리가 아니라 진짜 조립에 가까웠다. 우리는 어제 수다를 떠느라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했고 다들 퉁퉁 부운 눈으로 시리얼을 입에 붓고 샌드위치를 조립한다. 


“오늘은 뭐하지?” 

키텔이 조립 중이던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말을 꺼낸다.   

“우리 거기 가면 안돼? 그, 나 맨 처음에, 여기 도착했을 때 지나갔던 공원. “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공원에 누워있을까? 날씨도 너무 좋은데.” 

오늘 우리는 낡은 블랑켓 와 작은 스피커, 아침부터 각자 손수 조립한 샌드위치를 가방에 고이 모셔 넣고 에를랑겐의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앉아 있는데 손키스를 날리며 달려온 꼬마숙녀. 아이 귀여워! 이름은 이자벨라 미아! 베네수엘라에서 온  3살난 아가씨  


토마스는 여행 가이드로서의 의무가 느껴지는 듯 우리를 공원 옆 보타니컬 가든으로 끌고 가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으나 나와 키텔은 점심시간이 막 끝나고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을 바라보듯 아직 붓기조차빠지지 않은 눈을 꿈뻑이며 고개만 떨구었다. 

“너희는 여행 자니까 이런 거 많이 봐야지. 좀 더 보고 가!”

“우…우린 게으른 여행 자니까 괜찮아. 토마스 너도 피곤하잖아, 공원 가서 어서 눕자!”

낮잠도 잠시 자고, 지나가는 사람들, 앉아서 놀고 있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불어오는 바람소리, 흔들리는 잎새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본다. 가슴속 깊은 곳의 무게가 줄어들어 가벼워진 기분이다. 나는 기지개를 펴며 계속해서 피식 거리며 웃는다. 그리곤 담요 위에 누워 책을 읽는 토마스와 아직 졸고 있는 키텔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을 바라보는 큰 누나 역할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생들, 뭐 그런 생각했지?”

토마스는 참으로 귀신 같다. 라기보다… 내가 여기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을 땐 항상 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젠 토마스도 바로 눈치를 챈다. 

“솔직히 난 너보다 딱 1살 어리고 키텔은 너보다 1살 많아. 이점 명심해. 우린 아기 동생이 아니거든. “

“네, 선생님!” 

나의 장난에 토마스는 피식 웃고 나는 큰 소리로 깔깔거린다. 그 소리에 키텔이 눈을 떴다. 키텔은 작은 날곤충이라도 쫓아내듯 고개를 휘이 저으며 잠을 쫓아내려 애쓴다. 

“배고프다.” 

방금 전에 샌드위치를 먹고 잠이 들었던 키텔은 눈을 뜨자마자 다시 배고프다고 말한다. 

“아이고, 이 선생님이 또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야겠군.” 

“네, 선생님. 우리 뭐 먹을까요?”

“토마스가 왜 선생님이야?” 



우리는 잠이 덜 깬 키텔을 두고 근처 맥도널드에 가 햄버거를 사 왔다. 햄버거의 포장을 벗기고 한 입 크게 베어 문다. 샌드위치 먹어서 햄버거는 싫다던 키텔은 한입에 반을 헤치웠다. 

“I LOVE IT? 이게 맥도널드 캐치프라이즈지?” 키텔의 말에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이거 전 세계 공통이야.” 

“그래? 난 멕시코에서 맥도널드를 거의 가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이런 글귀를 보지도 못한 것 같은데 그렇구나.”

키텔은 남은 햄버거를 또 다시 한입에 해치우곤 포장지를 계속해서 뚫어져라 관찰한다. 마치 현미경이 눈꺼풀에 달린 듯 그는 매우 진지하게 포장의 글자 하나하나를 읽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캐치프라이즈가 있어? 인생에 모토 같은 거.”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우리는 진짜 수업시간의 학생들처럼 서로 눈을 피하곤 각자의 생각에 잠긴다.

“음, 글쎄다. 난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 떠오르는 게 없네? 좀 멋진 걸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혜림, 넌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선생님이 대답을 못하는데 나라고… 키텔 넌 뭐야? 넌 있어?” 

“난 행동은 언제나 옳다! 이거야. 생각만 하기보단 일단 무조건 행동하고 보는 거지!" 

"역시 라틴아메리카야! 독일인은 따라갈 수가 없군" 

키텔과 토마스는 하이파이브를 하곤 주먹을 맞댄다. 그 모습을 보며 웃다 보니 나는 문득 무언가가 떠 올랐다. 


"너희들 비틀스 노래 중에 Day tripper란 노래 알아? 날 대표하는 말은 이걸로 할래. 난 여행 자고 원래 삶이란 매일 매일이 여행이니까. 하루 하루 새로운 날들을 여행하듯 사는 거야!" 


"그거 참 좋다! 그래서 난 서핑이 좋아!"

"갑자기 웬 서핑?"

"서핑을 할 때 보면 파도 속에 몸이 잠기기도 하고 다시 떠 오르기도 하잖아. 물 속에서 떠 오르는 그 순간마다 난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 기분이야."

회사를 그만두고 서핑을 배우러 하와이에 갔던 키텔의 눈이연신 반짝인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 속에 하와이의 파란 파도가 반짝이는  듯하다. 

"부디 너의 운을 다 사용하지 않길 바라." 

"알았어. 난 어서 그 비틀스 노래 한번 들어봐야겠네.” 


집에 가려고 하면 꼭 어디론가 들어가 장난을 치는 녀석들 ㅋㅋ

동네 구경도 하고 근처에서 토마스의 친구 알레한드로, 여자친구 리나, 줄리안을 만나 다 함께 맥주도 한잔씩 했다. 에를랑겐이란 동네가 워낙 적다보니 센터의 술집, 카페 어디서든 토마스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맥주 한 잔에 꼬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입술 위에 촉촉이 젖은 건 맥주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웃음과 엄청난 양의 수다가 입 위에 젖어 마르질 않았다. 바를 나와 집으로 가는 길, 우리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골목에 자리한 펍에 들어가 술은 마시지 않고 다트와 축구 게임만 실컷 하다가 춤추듯 양 팔을 하늘 위로 흔들며 골목을 달렸다. 


“으아, 진짜 기분 좋다. 여기 공기 엄청 맑아!!!!” 

“야. 저기 하늘에 별 좀 봐!!! 별자리가 눈에 보여!”

“우와, 북두칠성이야!!! 진짜 오랜만에 실제로 보는 것 같아!” 


우리는 조그만 숲길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빽빽 지르며 붉어진 뺨을 달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죽다니, 믿을 수가 없어!!! 난 내일부터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다시 읽을 거야!”

책벌레 토마스다운 주정이라 생각하며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뭐, 사실 취할 정도로 마신 것도 아니지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읽어봤어? 진짜 아름답고 비극적이지 않아?” 

나는 이내 토마스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모범생적인 대화를 이끈다. 


“난 헤르만 헤세가 좋아! 우리 내일, 그 골목에 있던 헌책방 가보자! 난 내일 헤르만 헤세의 책을 사겠어.”

정말 오랜만이다, 이런 대화. 학생 때 용돈을 받으면, 시험이 끝나면, 학교 앞 서점에 조르르 달려가 소설책과 만화책을 뒤척이며 오랜 시간 쪼그려 앉아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 아빠가 나를 데리러 오기도 했고 읽고 있던 책을  사주기도했었다. 서점아주머니는 나에게 눈이 크다며 동물이 주인공인 만화의 캐릭터 이름을 불러주시곤 했는데. 이름이 뭐더라…


“으아, 바람 분다! 밤은 춥구나!” 


키텔이 갑자기 용수철처럼 아래 위로 뛴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책과 영화를 그저 ‘소모’용으로 치부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어린 소년, 소녀처럼 글귀 한 줄, 한 줄에 감명받던 나를 이제야 다시 찾은 것 같아 기뻤다.     
벤, 알레한드로, 토마스.... 그리고 줄리안의 옆모습

“혜림,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다 읽었다고 했지? 그럼 ‘Hector and the Search for Happiness’란책을 읽어볼래? 이책도 무척 흥미진진한 게 너의 여행에 영감을 줄 것 같아.” 

“알겠습니다, 선생님! 춥다어서 들어가자!”

우리는 촐랑촐랑  온몸으로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발을 구르며 어두운 밤 아래 우리를 반겨줄 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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