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미움이 아니야, 너무 사랑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불안은 시간을 먹으며 자라남에 틀림없다. 그리곤 두드러기처럼 한번 솟아나면 빠르게 번져나간다. 요즘 들어, 아니 한해 한해 불안감이 더 커지는 것 같아 신경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나름 아등바등 노력하고 있는데, 이 불안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커져요.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어요. 그리고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불안해요. 사랑받는 기분이 사라져서 일까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일까요?”
“최근에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볼래요?”
나는 최근에 이별을 했다. 이번 이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떠나는 자, 붙잡는 자가 없었다. 내가 그를 떠난 건지,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건지 헤아려 보기 어려운 그런 이별. 들뜬 설렘 속에 시작해 비난과 눈물 속에 막을 내린 보편적 이별.
“그리고 코로나에 걸렸어요. 일주일을 계속 앓았네요. 목이랑 귀가 어찌나 아프던지 다신 겪고 싶지 않아요.”
코로나에 걸리고 7일간의 격리가 시작됐다.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 회사는 계속 재택 체계를 유지했기에 집 안에서 만의 생활은 이미 익숙했다. 13평 남짓한 세상이 다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고양이와 같은 삶. 매일 아침 환기를 하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 새벽 배송으로 받은 소고기로 미역국을 끓였다. 목이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기도 했고, 귀의 통증과 몸살이 심해 침대를 구르기도 했지만 나는 다시 일어나 집 청소를 하고 호박죽을 끓였다. 입맛이 없고 무언가 먹을 때마다 목 통증이 심해 끼니를 거르고 싶어질 때가 많았지만 그럴수록 불 조절이 까다롭고 예민한 솥밥을 지었다.
“아픈데 솥밥까지 지었다고요?”
“약을 먹어야 하니까요. 3끼를 먹어야 약을 3번 먹을 수 있잖아요. 그래야 빨리 나을 테니 억지로라도 노력했죠.”
“장하네요, 정말 장해요. 혼자서 정말 대단하네요.”
얼마 만에 들어본 칭찬이지? 순간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릴 땐 어른들이 칭찬만 해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항상 칭찬을 받고 싶어서 노력했고 착하고 올바른 행동을 하려 애썼다. 칭찬을 받기 위해 어려운 책을 읽고, 어른스러운 말투를 썼으며, 화를 내지 않고 참는 방식을 택했다. 작은 여자아이는 칭찬을 위해 혼자 울고, 혼자 괴로워하고, 혼자 삭히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땐 어린이였고, 10대였으까. 하지만 창피하게도 30대가 된 나는 여전히 칭찬에 약하다. 초등학생의 방학 숙제를 검사하며 도장을 찍어주는 선생님처럼, 정말 장해요. 대단해요.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의사 앞에서 다 자란 나는 눈물을 쏟았다. 최근 이별을 하고도 크게 울지 않았다. 몸이 아파도 눈물이 나진 않았고, 슬픈 영화를 봐도, 전 세계를 울린 베스트셀러를 읽어도 눈물은 전혀 흐르지 않았다. 공감능력이 떨어진 건 아닐까, 나이를 먹고 냉혈한 사람이 된 걸까 문득 고민을 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인생 대부분을 울보로 살았기에,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우는 것보단 울지 않는 게 일상적이고 어른스러운 생활을 이어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칭찬에 약해요.”
나는 가끔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이렇게 말했었다.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잘 모르는 타인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는다. 칭찬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인정했다는 관심의 표현이다. 나는 오랜 시간 사랑 역시 그와 비슷한 결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상대에게 칭찬을 받지 못하면 우울해하고 스스로 자존감을 갉아먹고, 그렇기에 칭찬을 강요하고 슬퍼하고. 나의 눈물에 의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장해요, 대단해요를 반복했다. 내 눈물이 모두 소진되고 대신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밀려와 웃음이 터질 때까지 그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곤 물었다.
“가족들은 혜림 씨를 돌봤나요?”
“혼자 살기도 하고, 전염병이잖아요. 그리고 너무 멀리 사셔서 통화만 매일 했어요.”
“그전에 다른 이유로 크게 아팠던 적이 있나요?”
항상 긴장감 속에 어깨를 움츠렸던 타지에서의 첫 직장 생활. 그곳은 바둑판처럼 빽빽하고 숨을 쉴 여유도 없는, 먹고 먹히기만을 반복하는 벌판이었다. 그때 내 건강은 나를 돌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위경련이란 악수를 뒀다. 나는 새벽녘 울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엄마는 당장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녀는 나에게 어서 119를 불러라고 했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119를 눌렀다. 속이 너무 아파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요. 너무 괴로워요. 응급실에 실려간 그날의 모습은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들것에 실려 과호흡을 방지하기 위해 황토색종이 봉투를 입에 대고 들숨 날숨을 쉬었다. 하얀 가운의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갔고, 진통 제과 진경제가 든 수액이 파랗게 핏발 선 손등에 꽂혔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나의 병은 가소로울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고 침대는 자리가 없어 병원 한구석에 비치된 의자에 방치된 체 수액을 맞았다. 간호사는 수액이 바닥을 보이자 귀가 조치했고 홀로 새벽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나는 급체를 하고, 위경련이 와 괴로우면 택시를 불러 가까운 응급실을 갔다. 그리고 늘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홀로 진정하고 터벅터벅 돌아왔다.
“난소 낭종 파열이 있어서 집에서 쓰러졌던 적이 있어요.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119를 불렀죠. 출혈이 많고 혈압이 너무 낮아 복강경 수술을 받았어요. 그건 살면서 제가 겪은 고통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이에요. 아, 작년에 요리를 하다 칼날에 손을 베서 응급실을 간 적이 있어요. 4 바늘 정도 꿰맸었죠.”
“그때 가족들은 혜림 씨 곁에 있었나요?”
살면서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올 수 없는 게, 곁에 없는 게 당연했기에 가족들에게 조금의 기대나 부탁도 하지 않았다. 가게를 하니까, 부산에 사니까, 바쁘니까, 차비가 비싸니까.
“부모님이 혜림 씨를 보러 서울에 얼마나 자주 오셨어요?”
“글쌔요, 10년 동안 3번 정도 오셨던 것 같아요. 첫 집을 구할 때, 그 집으로 이사 갈 때, 그리고 친척 결혼식 때?”
“부산에는 자주 가세요?”
“일 년에 3~4번 정도 가요.”
의사는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유를 알겠네요. 의지 할 줄을 모르네.”라고 그는 말하며 어린아이의 어설픈 실수를 보듯 웃었다. 갑작스러운 의사의 웃음에 “네?”하고 잠시 놀랐다. 곧이어 그는 그동안 혼자서 고생 많았다고 말했고 그 말에 소강된 눈물이 찔끔 다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남한테 의지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적이 없어서 힘든 거예요. 연애하면 막상 남자 친구에게 의지하지도 못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했다. 나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는 남들보다 스스로의 단점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수없이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그 생각만큼 오만한 자만심이 커졌다. 그게 오히려 자기 연민에 빠져 가여운 스스로를 홀로 지키려 한 걸지도 몰랐다. 그냥 의지하는 방법을 몰라서 늘 홀로 단단하게 서 거센 사회생활과 거친 사람들에게 맨몸으로 뻣뻣하게 맞서 부딪혔다. 나는 무지했다. 그 결과 태풍에 곧은 나무가 부러지듯, 단단하게 홀로 선 내 마음은 우지끈하고 부러졌다.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의지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혼자 앓고 혼자 품었다. 되돌아보니 슬프게도 그들 역시 나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외로운 나에게 다정히 가르쳐 주려 노력했으나 내가 거부해온 건 아닐까? 문득 내 지난 사랑들에 애도를 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연애할 때마다 지속된 원인 모를 다툼과 섭섭함이란 감정의 원인을 한 가지 알아낸 것 같다. 내가 거부했거나 실패한 애정에 미안함과 슬픔을 담아 오답노트를 쓰듯 애도해야겠다.
“몸이 많이 아픈 날, 가끔이긴 하지만 밝은 편의점에 가면 몸이 낫는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을 땐, 혼날 용기도, 사과할 용기도 나고 몸도 아프지 않은 힘을 얻는다랄까요. 그래서 하기 어려운 말을 전화로 전해야 하거나 문자로 보내야 할 땐 종종 카페에 가요. 그곳엔 사람들이 있고 힘을 주니까요”
이 거친 세상에 어느 곳에도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란 어른은 무의식에 어딘가 의지할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패착이다. 더 늦기 전에 판을 물려야겠다. 아니 다시 시작해야겠다. 잘못 둔 바둑돌을 와르르 쏟아내야겠다.
그날 저녁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엄마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을 꺼냈다.
“엄마, 아빠는 왜 서울 안 와? 나 안 보고 싶어?”
“갑자기 왜?”
“코로나는 그렇다 치고, 나 이사 갈 때마다 딸이 사는 집 좀 보러 오고, 큰 수술하고 아프고 그러면 걱정돼서 한 번쯤 올라올 법하잖아.”
비난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지만 한번 터진 섭섭함은 엄마에게 끝없는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그리곤 병원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그녀에게 전했다. 그녀는 대꾸 없이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엄마는 전화를 할 때 늘 웃는 사람이었다. 늦은 밤이든, 아침이든, 일하던 도중이든 늘 밝게 전화를 받고 어떠한 이야기에도 조용히 경청하기보다는 즉각적으로 감정에 반응을 해주는 사람. 하지만 이번 대화에서 그녀는 잠시 반응을 멈췄다.
“음… 엄마 아빠는… 우린 가게를 하니까. 그리고 엄마가 한동안 아프기도 했고. 돈이 없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적도 있고. 그랬지. 이것저것 핑계 대다 보니 그래서 못 갔네. 그런 것 같네. 너 시집가기 전엔 한번 가야 하는데. 그 전엔 꼭 갈게.”
“아니 내가 언제 시집갈 줄 알고? 나 이번에 남자 친구랑도 헤어졌잖아.”
“그 애랑은 잘 헤어졌어. 그리고, 뭐 40 전엔 가겠지. 안 그래? 요즘 다 늦게 가잖아. 그리고 인연이란 게 있는데 곧 나타날 거야. 엄마는 걱정 안 한다. 너 시집가기 전엔 꼭 서울 갈게. 미안해.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코로나도 걸리고 우리 딸이 참 많이 고생했네. ”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 침묵 사이에 울려 퍼진 미안해라는 말. 사실 언제나 내가 묻기 전에 대답해주길 바랬던 말이다. 하지만 엄마도 의지하지 못하는 모지리 딸이 스스로 화를 내고 짜증내고 물어보길 바랬던 건 아닐까? 순간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엄마, 아빠가 서울 살면 좋겠어. 누나 쌩까는 남동생은 필요 없고 친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좀 덜 외로워하고 불안해하고 힘들어했을 것 같아. 같이 놀러도 다니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엄마랑 큰 이모들처럼”
“그럼 지금이라도 엄마가 언니 해줄게. 엄마는 7남매의 막내라서 동생을 가져본 적이 없잖니. 이번에 엄마가 언니 해줄게.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