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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y 11. 2016

신주쿠의 바 DUG, 그리고 옆자리의  낯선 남자

도쿄, 3개의 이야기 - 첫 번째: 노르웨이의 숲




한 밤중을 떠도는 고기잡이배의 불빛처럼, 검고 푸른 어둠의 안개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불빛이 있다.

번잡하고도 복잡한 도쿄의 길모퉁이에 서 몸을 한쪽으로 틀고, 지도도, 생각도 없이 두 팔을 흔들며 걷고 걷는다. 그러다보면 시골처럼 불빛 없는 길과 꿈속 같은 오래된 레일을 지나 은은히 어둠을 비집고 나오는 불빛이 있다.




Tokyo [東京(동경)]

신주쿠의 바 DUG, 그리고 옆자리의  낯선 남자...




도쿄에서 나는 매일 새로운 불빛을 봤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나를 재촉하는 도쿄의 불빛은 느릿하고 게으른 내 몸뚱이를 살짝 미치게 만들었다.그 미칠 것 같은 기분은 나를 한껏 들뜨게 해 어느 순간 첫눈에 반한 사랑처럼 강렬히 내 시선을, 몸을 이끈다. 낯선 이의 육감적인 손길처럼, 혹은 샴푸 냄새를 품은 타인의 머리카락이 콧등을 스칠 때처럼 간지럽고 야릇하게 설레는 기분...


어제 밤, 나는 노르웨이 숲을 헤매던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손을 잡고 차갑게 삼켰던 보드카 토닉에 투영된 재즈 바의 흐린 불빛에 홀렸다.



나는 신주쿠의 한켠, 어두운 지하의 작은 바로 발을 움직였다. 컴컴한 계단 아래, 시력을 잃지 않을 정도의 옅은 주황빛이 눈 앞에 아른거리는 좁고 어두운 바. 문을 열자 1920년대 재즈의 시대로 이동한 듯 시끄러운 재즈 뮤직이 귀를 뚫고 나와 눈코입을 마비시켰다.


노르웨이 숲의 와타나베는 위대한 개츠비를 3번 읽어야만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으나, 하루키와는 이곳, 1920년대 풍의 바 더그(DUG)를 3번은 와야만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보드카 토닉 한잔 부탁드립니다."

왼쪽 뺨에 DUG란 검은 글씨를 무늬처럼 그린 중년의 바텐더는 호방하게 웃으며 "DUG에 아름다운 하루키스트 한 명이 또 추가됐군요."라고 립서비스를 던진다.


2개의 작은 테이블, 좁다란 바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찼고, 음악은 점점 더 크게 공간을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목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수많은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재즈 소리가 마치 싸우듯 뒤엉키고 이내 산산이 부서져 귓속에 날카롭게 내린다. 점점 이게 음악인지 소음인지, 내가 신주쿠에 있는지, 여행인지, 꿈인지, 책 속인지 모를 만큼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나는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 책은 어떤 책인가요? 표지는 에곤 쉴레인데 그림에 관한 책인가요?"

바텐더의 목소리치곤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근접하게 오른쪽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곁은 새로운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왼쪽에는 마른 중년의 남자와 잿빛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중년, 아니 노년에 가까운 주름진 남자가 금빛 안경테를 빛내며 나의 책을 호기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Osamu dazai, No longer human.


금빛 안경테의 주름진 남자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을 중얼거린다. 혀끝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그리듯 오래오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일본 작가를 좋아해요? 그럼 당연히 하루키의 책을 읽고 이 곳에 왔겠네요?"

"그녀는 이 곳을 찾는 수많은 하루키스트 중 한 명이에요, 한국에서 온 미도리죠. 보세요, 미도리는 보드카 토닉을 시켰잖아요?"

DUG를 뺨에 그린 바텐더가 나의 대답을 인터셉트했다. 그리곤 두 사람은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이 바의 20년 된 단골이자 우리의 친구예요."

나의 고립된 눈빛을 눈치 빠르게 캐치한 바텐더는 다시금 호방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 주름진 남자를 소개한다. 그는 정장 자켓 안주머니에서 정장과 똑같은 색의 명함지갑을 꺼낸다. 도쿄 인근 어느 대학교의 명예교수 <Chiaki Takahashi>, 그의 이름이다. 그는 역시나 주름진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나 역시 주섬주섬 명함을 꺼내 건넨다. 낯선 이의 물음에 평소답지 않게 나는 약간 긴장한 듯 더욱 너스레를 떨며 웃는다. 잠시 동안 책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다시 하루키 이야기를 한다.


"이 시끄러운 DUG에서 인간실격을 읽는 하루키스트님은 도쿄의 바를 많이 가보셨나요?"

"아뇨, 엊그제 갔던 긴자의 바 루팡이 첫 번째, 오늘 DUG가 두 번째예요. 술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그럼 아직 진짜 도쿄를 못 봤겠네, 안타까워라."

"진짜 도쿄요?"


Real Tokyo...?

홀짝이던 보드카 토닉은 어느새 바닥나고, 진짜 도쿄라니 나는 그것이 어떠한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DUG는 점점 사냥꾼들이 주시하는 토끼굴 마냥 희뿌연 스모그로 가득 찼고, 맵고 쓰린 스모그 속에서 재즈 선율은 과거의 음악을, 1920년대 그 언젠가에도 연주됐을 법한 올드한 재즈 선율을 뿜어댔다.



치아키 교수는 나의 빈잔을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진짜 도쿄를 보여주겠노라 자신을 따라 나오라고 말한다. 당황한 나는 DUG를 그린 바텐더의 얼굴을 본다. 중년, 아니 역시나 노년을 앞둔듯한 DUG를 뺨에 그린 바텐더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번진다. 그리곤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 그는 나에게 소곤거린다.


"아하, 골든 가이(Golden gai) 말하는 걸 거예요. 저분이 골든 가이에 오래되고 멋진 바들의 단골이거든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절대 이상한 분 아니니까. 한번 따라가 봐요. 도쿄 여행의 클라이맥스가 될 거예요."

"그래요, 하루키스트는 용감하죠."

"아뇨, 용기는 필요 없어요. 그냥 멋진 여주인들에게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몇 소절 듣고 집으로 돌아가 푹 자요. 걱정 말아요, 입장료도 술도 내가 사줄 예정이었지만 걱정되면 술은 안 마셔도 돼요. 그냥 진짜 오랜 시간 이 신주쿠를 지켜온, 진짜 도쿄를 겪어온 골든 가이의 사람들을 만나봐요. 내일 여행에 방해되지 않게 일찍 택시 태워 보낼 거예요. 아마 그녀들의 이야기는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럼, 마스터! 계산해줘요. 여기 하루키스트 아가씨꺼 까지."



"재밌는 밤 되고, 좋은 여행되길 바라요. 미도리 짱."







도쿄 방문은 두 번째였다.

여행은 한 번에 많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 번의 여행에서 모든 것을 보면 다음 여행이 가난해진다'고 작가 김영하는 말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있게 말이다.



첫 번째 도쿄 여행에서 나는 고개 숙인 여행자였다. 가이드에, 핸드폰 구글 맵에 고개를 바닥으로 틀어 박은 여행자였다. 호텔의 리셉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관광지 팸플릿의 말에 길을 기울였다.  


두 번째 나의 여행은 미아 같다. 무척이나 낙천적이다 못해 조금 모자란 아이는 아무런 준비 없이 길을 잃고도 두려움을 모른다. 고개를 숙일 줄 모르고, 고개를 들다 못해 시퍼런 하늘을 본다. 낯선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순간 밀려오는 적막 속에 고독히 말을 거는 오래 전의 나,  어제의 나, 미래의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여행지에서의 나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이전의 잘못에, 옛날의 잘못에, 수치스럽던, 괴로웠던 기억을 살짝 끄집어내곤 양팔로 강하게 안아줄 줄 안다. 간밤에 악몽을 꾼다 한들 다음날 그 악몽을 반찬 삼아 밥을 먹어 치울 수 있다. 첫 번째 도쿄에선 기억나는 꿈을 꾸지 않았는데, 두 번째 도쿄에선 참으로 많은 꿈을 꿨고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래서일까? 두 번째 도쿄는 낮도, 밤도, 몽롱한 꿈길을 걷는것만 같다.



그날 밤, 나는 치아키 교수를 따라 기묘한 분위기의 골든 가이 사이를 걸었다. 치아키 교수는 묵묵히 뒷짐을 지고 학생을 인솔하는 선생님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걸으며 무어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양쪽에 기묘할 정도로 작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바들, 가게들 마다 흘러나오는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형형색색의 빛에 나는 그가 무어라 이야기하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사치에입니다. 이 아가씨는 누구죠?"

"유키코예요, 전 영어를 잘 못해요."

"미나입니다. 어머, 저보다 언니시네요."

"치아키 교수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한국에서 왔다고? 아이고, 여기서 외국인은 처음 봐, 한잔 받아요."(할아버지 손님은 골든 가이를 30년 전부터 왔다고 했다.)

"혹시 엔카는 들어요?"(어느 아저씨 손님 왈)

"사케 마실 줄 알아요?"(역시나 아저씨 손님)


"나중에 나 한국 가면 가이드해줄래요? 우리 엄마가 한류 팬이라 서울에 3번이나 갔었어요."(미나 씨는 한국 여행 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줬다.)



"아가씨가 이런데 혼자 여행하면 큰일이에요. 치아키 교수님이 좋은 분이라 그렇지, 다음부턴 이런데 따라오지 마요!" (사치에 씨는 기모노를 입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 주인이었다.)


"우리 라인 아이디 교환할래요? 재밌는 아가씨 같네, 종종 연락해요."(바 여주인과 나는 진짜 라인 아이디를 교환했다. 다음날 서로 잠시 문자를 했으나 한국에 온 이후로 우리는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내가 바가 여기 말고 저기 뒤에도 또 있는데, 다음에 여행 올 땐 미리 연락해요. 좋은 술 줄게." (바 여주인의 명함을 받았다. 명함이 어디 갔더라...)



"혹시 루팡 3세 알아요? 알아요?! 좋아해요? 오늘따라 루팡 3세 주제가가 틀고 싶어서... 오늘 오신 손님들 모두가 루팡 3세 팬이에요! 나도 그렇고요!" (손님은 단 5명, 우리까지 포함이다. 가게가 너무 작아서 5명이면 가득 찬다. 바 주인과 아저씨들은 목청이 터져라 주제가를 따라 불렀다.)



4개의 바, 6명의 주인, 5명의 손님을 만났다.

그래도 조금의 불안이 남아있던 탓에 술은 한잔도 하지 않고 바를 돌곤 바를 나와 택시를 탔다.







꿈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날의 밤이 꿈만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었던지, 무슨 음악이 나왔었는지 따위는 제대로 기억나지가 않는다. 그저 아득히, 정말로 오래 전,  도서관에서 잠시 읽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단편소설 같은 그런 흐린 기억만이 접시에 말라붙은 음식물을 뜯어내듯 나로인해 머릿속에서 뜯겨나올뿐.






도쿄는 참으로 이상하다. 도쿄는 재미가 있다. 도쿄는 수상하다.

그렇게 자리에 누워 불을 끈다. 눈 앞에 아무런 불빛도 감지할 수 없는 순간이 되어서야 나는 베개에 머리를 깊이 묻으며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하루가 다 그렇지. 새롭고, 수상하고, 이상하고, 재미가 있지.'






10년지기 친구 Heather와 Ray 여행잡문

따로 방문한 도시, 똑같은 장소, 각각의 기록


글: HEATEHR

사진: 나만 알고 싶은 사진찍는 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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