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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Mar 08. 2016

안녕, 내 29살의 여름...  안녕, 북쪽의 나라들

무작정 떠난 여행은 애초에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야

오슬로에선 버스를 단 한 번도 타지 않았다. 편도 8,000원이란 가격이 너무 비싸 모든 장소를 걸어 다녔다.

하나 비겔란 조각상이 있는 비겔란 공원은 차마 걸어갈 수 없는 거리다.


나는 지도를 보며 잠시 고민을 하다 우선 가까운 입센 박물관으로 갔다. 물론 이 곳 역시, 피플 앤 커피에서 걸어서 2~30분 거리 었지만 이제 걷는 게 일상이 된 나에게 2~30분은 당연히 걸어야 하는 거리로 느껴진다.


국립극장을 돌아 입센이 자주 갔다는 카페 그랜드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입센 박물관이 보인다. 지도 한 장에 의지해 크게 길을 헤매지 않고 이 곳까지 온 내가 대견해 씨익 웃음을 짓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도에 집중하느라 날이 흐려진지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가방엔 우비가 있고 박물관도 이미 다 도착했다.


입센 박물관 앞 익살스런 입센 코스프레 안내자들


‘인형의 집’과 같은 유명한 희곡을 쓴 노르웨이의 대표작가 헨리크 입센. 하나 현대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의 박물관이 너무 조촐해 나를 당황시켰다.


입센 박물관은 애초에 큰 기대도 하지도 않았지만, 이 단출한 구성에 나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덴마크에서 안데르센 박물관을 갔을 때 꽤 큰 감동을 받았던지라 그처럼 훌륭한 구성을 기대해서 일지도 모른다.

나는 순식간에 박물관을 살펴보곤 입센 관련 다큐멘터리 한편을 시청한 후 1시간도 그곳을 머물지 못한 체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아까 내렸던 비가 소나기였는지 그 사이 하늘은 물청소를 한 유리창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한번 탑승 8,000원. 버스 정류장에 서서 지도를 들었다 내렸다 고민을 한다. 걸어서 1시간 반은 걸릴 거리를 걷는 건 확실히 무리겠지. 버스 기사에게 표를 사고 빈자리에 앉는다.


조각가 구스타브 비겔란(GustavVigeland)이 평생을 바쳐 조성한 비겔란 공원.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기사 곁으로 간다. 비겔란 공원에서 가장 가까운 역을 알려 달라고 묻곤 그 옆에 서서 버스에 몸을 맡긴다. 15~20분 정도 지났을까?


“여기서 내려야 해요!”


버스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잠시 넋을 잃었던 나를 깨웠다.







화들짝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더니 길고 텅 빈 오르막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새하얗다고 할 순 없지만 모래사장처럼 빛나는 흰빛과 시멘트의 회색빛이 섞인 길. 나는 지도를 펼쳐 들고 그 길을 터덜터덜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내 뒤에 4인 가족이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이 누가 봐도 가족임을 증명하는 4명은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내뱉으며 내 곁을 스쳐 어느덧 내 앞을 가로질러 걷는다. 그 가족들을 따라 또다시 10여분을 걷다 보니 인공적으로 빛나는 회색의 길은 드디어 녹음 짙은 살아있는 잔디로 변모했다.


캐치볼을 하는 어린 소년들을 지나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진 붉은 머리 가족을 찾아 고객을 사방으로 돌리던 나에게 저 멀리 오벨리스크처럼 우뚝 솟은 기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놀리텐이다. 와, 드디어다 왔네.”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던 모놀리 텐이 눈동자 중앙을 가르자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모놀리텐을 바라본다.


모놀리텐 바로 옆에는 뜻밖의 무지개가 아름답게 떠 있다.

오슬로의 마지막 날, 12인의 남녀가 괴로이 온몸을 뒤틀고 있는 작품 ‘모놀리텐’ 옆에는 세상 모든 괴로움을 씻어 줄 것 같은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7색의 빛깔이 구원의 손처럼 빛을 낸다.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기도 잠시, 점점 색채를 잃어가던 무지개는 구정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순식간에 그 색을 흡수당했고 곧이어 하늘에선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황급히 외투를 머리에 쓰거나 우산을 꺼낸다. 나 역시 가방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비닐봉지로 가방을 감싼다.



이젠 많이 익숙해진 노르웨이의 강렬하고 묵직한 빗방울. 이 곳에서 나를 물들이던 짙은 푸름도, 정신을 잃을 만큼 세차게 쏟아지던 폭우도, 이토록 나를 흠뻑 적셔오는 빗물도, 미소 지을 만큼 온기를 불어넣어주던 햇빛도 이젠 정말 안녕이다.


온몸의 영혼부터 장기까지 모조리 꺼내어가 초록빛으로 치장해주었던 신비로운 노르웨이의 숲.

숲 속을 홀로 거닐다 적막 속에 갇힌다. 나무만이 흔들리며 숲의 정령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들만의 언어를 내뱉는 순간, 깊고 어두운 구렁텅이가 갑자기 나타나 나를 한순간에 가두곤 이 곳의 나무로 만드는 저주를 내린다한들 이제 나는 슬퍼하지 않고 담담히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많은 걸 이루고 싶었다.

많은 것을 버리고, 비우고, 새로이 태어나고 싶었다.

숲에서 나는 많은 것을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리움이란 것, 기다림의 이름은 짙은 녹음처럼 색이 짙어졌고, 차가운 피오르드의 녹지 않는 빙하처럼 다 같이, 새하얗게 얼어 버렸다.



나를 비우고, 버리기 보단 내 스스로를 내 안에 더욱 간직하라는 것일까?



폭우를 온몸으로 맞으며 올라왔던 오르막 언덕을 다시 걸어내려 간다. 문득 허무함보다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이렇게 온 몸으로 느껴지는 빗물처럼, 노르웨이의 숲 속의 나무를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한 일이 참으로 아쉽다. 10일 내내 나를 꼭 안아준 숲에게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나마 고마움의 인사를 건넨다.



비가 그친 후 마지막으로 소금산처럼 새하얀 오페라 하우스에 올라 사람들을 바라본다. 이제 나는 노르웨이를, 북유럽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한 달, 북유럽의 모든 도시들은 내가 떠남을 깨닫기가 무섭게 선명한 빛 한줄기, 따뜻한 바람 한 줌, 빛나는 무지개를 보내 그래도 내가 이 곳에서 사랑을 가득 받고 떠나감을 상기시켜 주었다.

마치 다시, 꼭 다시 돌아오라는 무언의 약속을 지정받은 기분이다.


차가운 밤바다의 냉기가 내 머리칼을 흔들자 떠남에 아쉬워 발끝에서 툭툭 차이던 기분이 조금은 차갑게 식어 나를 깨어나게 하는 것 같다.

 나는 이제 다시 짐을 끌고 공항으로 간다. 오늘은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한 나라를 떠나는 장소인 ‘공항’에서 밤을 지새울 생각을 하니 조금의 걱정과 함께 마음이 벅차오른다.


비행기로 이동을 할 때면 공항은 국경이나 다름없으니 나는 오늘 국경의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뜨거운 나라 크로아티아로 떠난다.







북유럽에서 무엇을 보려고?


처음 여행을 떠날 때, 친구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혹은 확실히 그녀를 설득시킬 만한 답변은 아직도 떠오르진 않는다.


“무사히만 다녀올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나의 대답은 어찌 보면 진정한 정답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떠난 여행은 애초에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무엇이란 결국 기대했던 사랑의 이별 후에 오는 당혹스러움과 같기에.


무작정 떠나는 여행, 단단하게 뼈대를 땅 속에 박아 넣고 조금의 틈도 없이 빽빽하게 쌓아 올린 시멘트 건물이 아닌, 유흥을 위해 하나, 하나 규칙 없이 쌓아 올린 젠가처럼 갑자기 무너져도 두려움이 없고, 모양이 틀어져도 웃음만이 나오는 놀이.



스물아홉 살, 아직 철을 덜 든 내가 보낸 여름 방학은 잘못 맞춘 자명종처럼 의도치 않은 늦잠을 허락했고, 갑자기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평범한 찰나의 순간들을 아름다운 드라마로 만들었다.


차가운 바람, 넘쳐나는 빗줄기, 예상치 못한 뜨거운 태양, 한 여름에 마주한 한 겨울, 키가 크고 눈이 푸른 금발의 사람들, 끝나지 않는 낮과 옅은 보랏빛의 밤.


마음을 조여 오는 광활한 녹음과 날카로움을 뽐내는 산, 본적 없는 시린 아름다움을 간직한 바다.

언제나 짧고 바쁘기만 했던 20대의 여름, 이제 그 끝자락에 선 나의 마지막 여름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한여름 밤의 꿈이 되어 짙은 여운 속에 작별의 손을 흔든다.  


안녕, 내 29살의 여름...  안녕, 북쪽의 나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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