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노력하고 행동한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말의 소리, <단어> 혹은 <문장>라고 불리는 소리들을 써본다.
달콤하다
어여쁘다
따스하다
포근하다
평범하다
반짝반짝
꽃
사랑
포옹
발걸음
.
.
.
이토록 다양한 어여쁜 소리 속에 나는 간헐적으로 <,> 같은 특정한 단어로 형용하기 힘든 소리를 듣는다.
한 의사 선생님은 이명은 귓속에 융털이 흔들리며 진동이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했고, 꾸준히 혈액순환제를 먹어 몸의 순환을 도와라고 했다. 융털이란 용어는 10대 시절 수업시간에 처음 들었던 같다.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그 존재가 원인이라고 하니 처음엔 공포에 가까웠던 그 소리는 점점 아주 조금은 신기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의사의 말을 이해해서, 이명의 원리를 알아서는 아니다. 나의 귀에서 돌고래의 울음 혹은 기계의 소음 같은 소리가 탄생된 것이 놀랍고도 기이해서다.
이명이 생긴 이후 나는 수시로 두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는다. 혹은 손가락을 귀에 꽂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무슨 일이야?"라는 친구의 질문에 나는 지금 들리는 소음이 내 귀에서 나는 소리인지 주변 소음인지 확인하는 거라고 말했다. 가끔은 실제로 내 귀에서 나는 소리이고, 대부분은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테이블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이며, 혹은 진짜 컴퓨터 소리일 때도 있다. 귀를 막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깊은 평온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웃음을 짓는다.
"버릇이 됐어."
30대가 된 후 처음 생긴 새로운 버릇이다.
어느 달이 좁은 몸에 비해 환희 밝고 유난히 날카롭던 날 밤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공룡이 포효하고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고, 도시의 사람들과 커다란 건물을 찢어발기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은 1인칭 시점으로 이어졌으며, 나인지 내가 아닌 어떠한 타인인지 모를 시선으로 낡은 집 방안을 훑었다. 그 방 안에는 맨몸으로 덜덜덜 몸을 떨고 있는 육중하고 까만 피부의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살려달라고 울고 있었다. 여인의 방 앞에 놓인 식탁에는 의자에 앉아 엄마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우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꿈속 모든 장면은 분명히 무성영화처럼 소리가 없었다. 하지만 살려달라는 말과, 공룡의 포효소리, 아이의 우는 소리가 어째서인지 선명히 들렸던 것만 같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명이 생긴 이후 침대에 몸을 뉘이면 커지는 이명에 불면증이 심해졌고, 겨우 잠이 들면 늘 악몽을 꿨다. 그 꿈들은 대게 이처럼 뜬금없고 불투명한 색을 가진 내용이었다. 잠에서 깨면 나는 역시나 불투명한 기억과 감정으로 꿈을 곱씹었다. 귓속의 소리가 만들어냈음에 분명한 이 이상한 꿈들의 조각을 맞춰본다. 매일 이어지는 꿈의 잔상들을 이어 맞춰 보려 아무리 노력해도 꿈은 연결점이 없고, 괴상하기만 하다. 결국 나는 괴상한 소음이 만들어낸 이 괴상한 영상은 말 그대로 그뿐, 아무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짓게 됐다.
주변에 이명이 생겼다는 말을 하면 대게 2가지 반응이다.
"어떡해... 너무 힘들겠다. 스트레스가 많아? 큰 병 아니야? 병원은?"
"이명... 사실 나도 있는데?"
첫 번째 반응을 들으면 이 병은 숨기고 싶은 병이다. 생명엔 딱히 지장이 없지만 불편한 이 병이 남들에겐 엄청난 병처럼 느껴지는 것 같아 그 걱정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마치 울어도 울지 않았다고, 슬퍼도 슬프지 않았다고,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말하듯, 어느덧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들려도 다른 소리에 묻혀버린 척 말하고 노력하게 됐다.
가끔 참을 수 없이 불편한 속내를 터놓고 싶어 져 겨우 말을 꺼냈다가 두 번째 반응을 들으면 반갑고도 안타깝다.
한 친구는 이명을 다른 소리로 가리우려 클래식을 틀어놓거나 오래된 영화를 틀어놓고 잔다고 했다. 현과 현이 부대끼는 소리와 건반의 차가운 부딪힘이 만드는 소리가 잘 조율된 이명처럼 그 음의 높낮이가 꼭 들어맞는다고 했다. 또한 오래된 영화의 후시 녹음된듯한 어색한 음향의 질이 이명과 적절히 어울려 그 존재를 잊게 된다고도 했다. 또 누군가는 술로 그 소리를 잊는다고 했다.
나 역시 그들처럼 나만의 방법을 찾아, 이명을 짙은 다른 음악에 묻으려 노력하고 적응을 하는 중이다.
그렇게 노력하며 살다 보면 어느덧 진실로 그 소리가 귓가에 흐르는 바람의 소리처럼 느껴지리라 나는 믿는다.
시들어버린 꽃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시들어버린 나의 귓속 미세한 융털들도 영원히 다시 살아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귓속의 소리가 당연한 듯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젠 삐- 하는 소음에 나는 손에 쥔 모든 것을 놓는다. 알람처럼 그 소리에 나는 모든 것을 놓고 잠시 쉰다.
불이 꺼진 어두운 방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 여름날의 풀벌레의 소리처럼 다정하고 고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