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장소 낯선 사랑의 형태
이것은 집요한 너에 대한 기록.
이별 후 나는 하루하루 잠들기 전 핸드폰 메모장에 몇 개의 문장, 혹은 단어를 쓴다. 이 것은 슬픔이기도 하고, 분노이기도 하고, 괴로움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나와 현실로 돌아가는 주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기록이라 하기엔 다소 거창한 문장의 난장을 곱게 어루만져 어여쁘게 불러본다.
타지에서, 서울에서 홀로 맞이하는 이별은 매번 세상의 빛의 궤적에서 영원히 떨어져 살아야 할 것 같은 검고 무거운 우울감을 준다. 우울에 빠져 모든 기력이 사라진다. 피부가 따갑고 눈이 저릴 만큼 울었음에도 빈 껍데기 같은 입술은 녹음된 음성메시지처럼 그의 이름을 부른다. 나의 마음은 쭈글쭈글 구겨진 옷처럼 볼품없어진다. 슬픔은 곧이어 자책이 된다.
다시 돋아난 불면증을 솎아 내려 들린 신경과에서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자책이 심해지면 우울증이 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책이란 건 어쩔 수 없는 연애의 순리겠지. 한 몸 같던 반이 자의든 타의든 뜯겨 나갔으니 우울증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나는 머릿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며 입으론 "주의할게요."라고 말한다.
이별 후 함께한 흔적이 묻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나는 깊은 후회를 했다. 한편으론 자기반성 혹은 이 연애에서 찾아낸 교훈 따위를 더듬어 꺼내보려 쓸데없는 노력을 해본다. 많은 사람들은 연애가 끝나고 나면 자기반성과 과거 복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 관계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고, 연애를 많이 할수록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순간 과거 나의 잘못이나 이러지 말아야지 따위는 일찌감치 다른 차원 속으로 빨려가 잊혀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모든 게 리셋된 고장 난 로봇처럼 또다시 비슷하거나 새로운 잘못을 반복할 뿐이었다.
내가 정말로 구제불능 인지도 모르겠지만 매번 나의 연애는 그랬다. 이번 역시 과거 연애에서 배운 교훈 따윈 적용되지 않았다. 비슷하지만 새로운 후회와 슬픔 자괴감만이 층층이 퇴적되어 몸속에 남을 뿐.
꽤 오랜 시간 살아온 서울의 땅, 이제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색과 공기와 길의 모양. 매일 땅을 강직함 정도를 발바닥으로 느끼며 토닥토닥 흙을 밟아 서울의 강직함을 더한 지 어느덧 7년. 이토록 익숙한 장소임에도 매번 낯선 사랑의 형태와 두려운 이별은 짧게는 1달, 길게는 몇 년의 후유증을 앓게 한다. 그 후유증 중 하나로 나는 길고 긴, 연속성은 없으나 반복적인 꿈을 꾼다. 원래도 꿈을 자주 꾸는 편인데 이별 후엔 늘 비슷한 꿈을 한동안 꾸곤 두통과 함께 잠을 깬다. 내 곁에서 사라진 사람, 잊히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에 선명히 찍힌 나의 검은 지장을 꿈에서 본다. 나의 지문으로 뭉개진 얼굴들이 춤을 추고 웃는다. 어린 시절 놀이터의 개미새끼를 누르듯 잔인하게 짓누른 얼굴들이 죽지 않고 꿈속을 맴돌며 나를 향해 울거나, 웃거나, 비웃는다.
이 관계는 너 혼자 지지부진하게 붙잡고 있는 거라고, 너만 끝내면 되는 관계라고 꿈은 말한다. 두통과 함께 꿈에서 깬 나는 "이제 진짜 끝이 났다."라고 한숨처럼 문장을 내뱉지만 결국 또다시 반복적으로 유사한 꿈을 꾸고 눈물을 흘린다. 마음을 닫고 사랑의 흐름을 멈추자. 슬픔이 더 커지기 전에 닫아버리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게 눈을 감자. 나는 오늘도 그렇게 다짐하며 침대에 몸을 뉘인다. 늘 그러하듯 잠을 청할 때면 심장은 아래위로 끊임없이 튀고 캄캄한 눈 앞에는 사랑했던 그의 영혼의 줄기들과 시간이 얼기설기 얽혀 방안에 은하수처럼 흐른다. 불이 꺼진 천장, 불이 꺼진 나의 마음속 어두운 공간은 난기류에 봉착한 비행기처럼 파르르 날뛴다.
또 하나의 연애가 끝났다.
깊은 열정이 서로를 아프게 했던, 커다랗던 사랑이 서로의 어깨를 뒤흔들던 눈물 나는 연애였다.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모두가 로미오와 줄리엣 속 줄리엣이 될 수 없다는 걸, 평범한 나는 깨닫고 펑펑 운다. 특별한 줄 알았고 특별할 것 같았던 나의 연애의 시작. 그 연애는 끝내 평범조차 지키지 못한 결핍 속에 지고지순한 열망도, 온몸을 터뜨리는 열정도 없이 한낮에 쏟아지는 우박처럼 예상치 못한 아픔과 상처만 주고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