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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Sep 02. 2018

귀를 쫓는 모험 - 어느 날, 귀가 들리지 않았다.

처음 이 병이 발발한 날은 그리 특별하거나 힘들고 괴로운 날도 아니었다.


누구나 귀를 드러내는 편이 더 아름답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화 속 안경을 벗어던진 여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닐지라도 신체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 특히 그 속이 훤히 보이는, 몸속으로 이어진 터널이 드러났다는 것은 당신을 믿고 있다는 표현처럼 느껴진다. 이성을 만났을 때 머리카락을 넘겨 귀를 보이고, 사랑하는 이의 귀를 만지작 거리는 것은 야릇하며서도 당신과 더욱 친밀해지고 싶다는 표현처럼 느껴지듯 귀의 개방은 좀 더 나를 솔직히 열어 보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전까지 내 귀에 이토록 특별한 관심을 쏟아본 적이 없었다. 귀는 귀일뿐이었다. 그저 소리를 듣게 하는 단순한 기능적 '기관', 혹은 살덩이. 수도꼭지가 물을 틀고, 변기가 물을 삼키듯 당연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야 하는 곳. 그게 너무 당연해 존재조차 희미한 곳. 가끔 귀걸이를 통해 치장이라는 것을 하지만 귀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끔뻑 끔뻑 무거운 눈꺼풀을 가진 이젠 돌아가신 할머니가 어쩌다 한번 "너의 귀는 네 아비를 닮았네."라며 관심을 보여주어 나를 놀라게 했던 곳. 


32년간 침묵을 지켜오던 착하던 나의 귀가 아픈지 약 9개월이 됐다. 우린 잘 참고, 싫어도, 괴로워도 아무 말하지 않고 이겨내는 사람을 착하다고 할 때가 많다. 그 상대가 나쁘다고 하지 않고 그저 참는 사람을, 딱히 티를 내지지 않고 묵묵하고 존재감 없는 사람을 곧잘 착하다고 칭한다. 나의 귀가 그랬다. 

그렇게 개성 없고 존재감이 없던 나의 착하던 귀가 문을 열고 소리를 내고 온몸을 흔들며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매캐한 향냄새 사이로 달큰한 밥알의 냄새가 뒤 엉퀴고 꾹꾹 눌러 담아 우뚝 솟아난 밥의 산에 조심스레 숟가락을 삽시 하듯 촘촘히 살덩이로 닫혀있던 귀 속 틈새로 형체 없는 무언가가 내리 꽂혔다. 내 삶에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봄날의 흔치 않은 우박처럼 달갑지 않게 일어났다. 


나의 귀가 활짝 열렸다고 했다. 병명은 '이관 개방증(耳管開放症)'.

이관은 평상시 닫혀 있으나, 이것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원인은 불명이다. 증상은 자신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고, 호흡성 이명 등이며 검진자가 이경으로 이관 환기의 호흡음을 청취할 수 있을 때 진단된다. 

- 출처 간호학 대사전-


귀와 코가 이어진 구간의 개폐가 자유롭지 못하고 닫혀야 할 때를 잊고 항상 열려있는 병. 무언가가 나에게로 오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다 받아내야 하는 것. 귀 속에 들어오는 바람도, 먼지도, 듣고 싶지 않은 고르지 않은 말들을 고스란히 삼켜야 하는 것, 문을 닫으려 애쓰는 근육의 안쓰러운 삐걱됨을 고스란히 느끼고 알아차려야 하는 것.

 

처음 이 병이 발발한 날은 그리 특별하거나 힘들고 괴로운 날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일 했고 어느 때와 같이 행동했다. 그저 얼굴이 수줍듯 붉어져 상기된 느낌으로 오전을 보내고 조금의 속 쓰림과 두통이 있는 정도였다. 밖에는 바람이 찬대 몸이 데워졌다. 처음으로 가벼운 이명이 일었다. 창호지에 구멍이 뚫린 듯 빈곤하지만 곧은 이명이었다. 그리곤 갑자기 자동차 에어백이 터지듯 오른쪽 귀가 먹먹해졌고 동굴에 갇힌 듯 소리가 안에서 웅얼 웅얼 말을 삼켰다. 조금 무서워졌다. 옆자리의 동료가 "혜림 씨 얼굴이 붉어요, 어디 아파요?"라고 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귀를 틀어막었다. 


나의 귀를 쫓는 모험의 시작이었다. 


병을 앓고 9개월이 지난 소해는 그저 무뎌진다는 것이 최고의 묘약이라는 것.

적막과 공허함을 한시도 싫어하는 나의 귀는 풍혈을 만들어 고요를 먹어치우고 귀 벽에 몸을 기대 힘껏 밀어낸다. 이제 나는 그간 나의 귀를 쫓아온 모험, 아니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모험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 나의 귀 사진을 보고 있으니 뭔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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