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오락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번화가로 나가야 한두 곳씩 보일 뿐이다. 허나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오락실은 꽤나 인기가 많았다. 어떤 동네에 가든 하나씩은 꼭 보였던 것 같다. 오락실에서 제일 인기 많은 게임을 꼽자면 펌프라고 할 수 있는데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중고딩, 성인들도 많이 했다.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재밌지만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현란한 발재간으로 펌프를 하는 친구, 언니, 오빠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난 왜 저렇게 못할까' 어린 나이에도 현타를 느꼈다.
언젠가는 친구가 정말 빠른 템포의, 화살표가 수도 없이 지나가는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걸 보았다. 그 곡은 정말 잘하는 사람들만 시도할 수 있었던 '베토벤 바이러스'었다. 나도 그 곡을 열심히 연습해서 최고 등급인 'S'를 맞고 싶었지만 펌프 한판에 무려 500원이나 해서 가난한 초딩이었던 나는 하루에 한판 하는 것도 힘들었다ㅠㅠ
난 어른이 되고 한참 후에, 내가 오락실에서 들었던 '베토벤 바이러스'가 실제 베토벤이 만든 음악을 기반으로 한 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펌프를 만든 회사, 사운드 팀에서 베토벤이 남긴 8번 소나타 비창의 3악장을 편곡한 것인데 두 번째 악장의 선율이 영화와 광고 등에 자주 사용돼 3악장보다는 2악장이 더 유명한 게 사실이다.
베토벤이 비창을 발표한 시기는 그의 나이 20대 후반 시절로, 당시 그는 청력 이상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작곡에 매진했다. 이 시기에 작품번호가 붙은 피아노 소나타만 무려 6곡이 작곡되었고, 이 외에도 바이올린 소나타 1~3번과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완성시켰다.
비창 소나타는 그때 당시 발표한 곡 중에서도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베스트셀러를 너머 밀리언셀러와도 같아 악보가 없어 못팔 지경이었다고 한다. 돈 좀 있다고 하는 연주자들과 귀족들도 이 악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심지어 베토벤의 제자 역시 악보를 구하지 못해 빌려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모든 이들이 악보마저 탐냈던 이 소나타는 베토벤이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카를 폰 리히노프스키 공작에게 헌정한 곡이다. 하지만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했던 베토벤은 카를 공작이 후원자라는 지위를 내세워 갑질을 하자 '너같은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오로지 한 명뿐이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과연 베토벤 다운 행동이라 말할 수 있는데 내가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하면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난 클래식 진짜 모르겠던데..'
사실 이 부분은 나도 공감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면서도 협주곡은 뭐고 교향곡은 뭐고, 빠르기를 나타내는 용어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즐기고자 듣는 것인데 왠지 모르게 공부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기도 하는데 난 연주기법이나 작품번호부터 접근하는 게 아니라 한번 들어보고 좋다 싶으면 해당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나 작곡 비하인트 스토리부터 찾아보는 편이다.
베토벤의 음악 역시 그의 인생을 다룬 책을 읽다가 음악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만약 클래식을 즐기고 싶다면 유명한 곡들을 몇 개 들어보고, 맘에 드는 곡을 작곡한 음악가의 이야기를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음악가일지라도 그들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우리처럼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기도 했다. 마치 소설책을 읽듯 그들의 삶을 읽어보고, 음악을 듣다 보면 클래식을 좀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