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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냐옹 Jun 03. 2023

크로바레코드-완결

23. 마녀와 늑대-H·J

     

마지막 곡이 흘러나온다. 헤드폰을 빼고, 작가와 PD 그리고 라디오 DJ에게 인사한다. 어색하기 짝이 없던 이 공간도 이제 적응을 했다. DJ 언니도 어리바리한 나를 잘 이끌어주셨다. 실수도 잘 덮어주시고. 정말 너무 좋다. 


오늘 부른 곡은 모노의 ‘넌 언제나’ 경연 때 불렀던 곡이지만, 그래도 떨렸다. 기타가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팔은 다 나았지만, 아직 손가락을 움직이는 건 어색하다. 


“인터넷 방송, 나도 들어봤어. 좋더라. 역시 제이는 심야방송에 적합한 목소리라니까.”

케이보다 한참 선배인 차 PD님이다.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회식자리에서 좀 친해졌다. 불독처럼 생긴 내면에 섬세함이 숨어 있달까.   

“아, 감사합니다.”

“11시에 하는 올드 팝 프로가 있는데, DJ가 6개월 동안 출산휴가로 쉬거든. 제이가 해보면 어떨까?”

“제가요?”

“응, 제이랑 음색이 비슷해서,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데.”

이건 무슨, 자다가 복권 긁는 경우래? 

“그래, 제이라면, 청취자들이 금방 적응하겠네. 목소리가 너무 다르면, 낯설어하거든.”

DJ 언니도 거들어준다. 이거 꿈 아니죠? 차 PD님 어깨 너머에서 케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분명 너의 강력 추천이 들어갔을 거야. 그렇지만, 놓치고 싶지 않을 걸.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래, 방송은 다음 달부터야. 세부 사항은 낮에 만나서 얘기하자.”

“넵!”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사뿐사뿐 걷는다. 임시직이지만, 그래도 정식 DJ가 되는구나.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익혀야겠다. 임시직이, 고정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력해야겠다. 정들었던 크로바 라디오 청취자들도 이해해 줄 거야. 멀리 가는 게 아니니까. 여러분, 저 여기 있어요. 좀 더 이른 11시에 만나요. 

추운 것도 모르고 걸었는데, 하얗게 보송보송한 솜뭉치가 하나 둘, 떨어진다. 어, 첫눈이다. 올해의 첫눈은 꼭 하니랑 보고 싶었는데, 전화라도 할까? 이 새벽에? 안돼. 자고 있을 거야. 

택시를 잡으려는데, 먼 데서 헤드라이트 불빛이 깜빡인다. 

“제이!”

차창을 열고, 하니가 팔을 흔든다. 아! 마중을 나왔구나! 첫눈이 오는 이날에, 나의 하니가! 

하니가 코트 깃을 열고 꽁꽁 언 나를 꼭 안아준다.


“첫눈이 올 때 만나기로 했잖아.”

“이 새벽에?”

“응, 이 새벽에.”

“자고 있을 줄 알았어.”

“일기예보에 첫눈 소식이 있었잖아. 어떻게 자.”

“하니가 와서 너무 좋아.”

그의 따뜻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인다. 포근포근 눈송이도 그의 품에서 녹아들겠지. 

따뜻하게 덥혀놓은 그의 차에 탄다. 그는 달콤한 키스부터. 이제는 양손으로 너를 안을 수 있어. 하니도 두 발로 내게 달려올 수 있어. 그것 봐. 같이 하면, 이런 시련 따위, 모두 추억이 될 거랬잖아. 부드럽고 따뜻한 네 입술에 나는 눈송이처럼 녹을 거 같아. 


“뒤에 있는 짐은 뭐야?”

가뿐 호흡을 정리하며 묻는다. 우리의 키스는 점점 길어져. 이러다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몰라. 

“제이와 나의 짐. 우리 지금 여행 갈 거거든.”

엥? 

“내일 출근하는 날이잖아?”

“그랬지. 근데, 더는 못 참겠어. 올해도 며칠 안 남았단 말이야.”

그래서, 이렇게 벼락치기로 여행을 간다고? 잠깐만, 나 마음의 준비도 아직 안 했는데? 

“걱정마.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그 말이 더 무서워요. 늑대 님. 설레는 표정의 하니가 도로를 내달린다. 왜 난 손끝까지 저릿저릿 한 건데. 

눈을 부릅떴지만, 어김없이 졸음이 찾아와서 시루떡처럼 잠들었다. 미안, 하니, 이건 불가항력이야. 


     

제이는 새근새근 잠들었다. 차만 타면 자는 이 병을 어찌하랴. 그래도 눈을 부릅뜨고 얼마간은 버텼다. 눈이 소복소복 쌓인 가지도 봤고, 네온이 찬란한 도시도 봤다. 불빛이 차츰 뜸해지고, 검게 솟은 봉우리들이 보일 무렵, 거의 실신했다. 아기처럼 잠든 제이는 내 설레는 마음을 모르겠지. 그 보드라운 뺨에 입 맞추고 싶은 쿵쿵 심장을 모르겠지. 


하늘 한쪽이 연파랑 색으로 밝아온다. 이제 곧 목적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숲속 펜션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자, 도로상태도 나빠진다. 조심조심 운전한다. 소중한 제이를 태웠으니까. 이제는 비포장도로다. 차가 어지간히 덜컹거렸는지, 실신했던 제이가 일어났다. 아직 비몽사몽. 저기 눈앞에 숲속 펜션이 보인다. 눈을 비비적대던 제이가 와아, 하고 감탄한다. 남쪽은 눈이 많이 내렸다. 

“와, 설국 같아.”

제이가 잠든 사이 이 세계는 설국이 됐어. 


바리바리 싸 온 짐엔, 연분홍 원피스와 와인, 그리고 맛있는 안주들. 우리 첫눈을 보면서 맛있는 거 먹자!

밀키트를 요리하는 동안 제이가 뽀얗게 씻고 나왔다. 그날 뚝섬에서 샀던 연분홍 원피스를 드디어 입었다. 내내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볼 수 있게 됐다. 아, 너무 귀여워. 앙증맞은 레이스가 제이와 찰떡같이 어울린다.

“하니만 보여주는 거야. 다른 데서 입으라고 하면 안 돼.”

왜? 나는 공주 같아서 좋은데, 세상 모든 사람한테 막, 자랑하고 싶은데.

“응.”

크림스파게티를 그릇에 담고, 소시지를 굽는다.

“하니도 씻고 나와. 나머진 내가 할게.”

응, 그럴게.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라서, 재빨리 돌아섰다. 연분홍 원피스를 입고 요리하는 제이를 더 보고 싶긴 해. 그래도, 장시간 달려서 나한테서 바람 냄새가 날 거야. 늑대 냄새가 날 수도 있고. 아웅.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탁이 차려졌다. 소시지도 알맞게 구워졌고. 치즈도 먹음직스럽다. 제이의 잔에 와인을 따른다. 제이도 내 잔에 붉은 사랑을 따라준다. 

붉게 동 터오는 하늘을 보며, 잔을 부딪친다. 우리의 파티는 지금부터, 먹다 잠들어도, 괜찮아. 내일도 모레도 함께 할 거니까. 제이는 스파게티를 먹고, 제이의 입술이 그리운 나도 스파게티를 먹는다. 끊지 않고 먹기다. 그래야, 우리의 입술이 닿을 테니까. 먹다 자도 괜찮아.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우리를 방해할 아무것도 없으니까.

깜찍한 그녀가 입술을 덮쳐온다. 음, 이건 반칙인데, 포도 향이 나는 숨결이 나를 간질인다. 어, 어, 이대론 너무 위험한데, 정신을 차리고 제이를 떼어놓는다. 제이가 아쉬운 듯 탄식한다. 공주님인 줄 알았더니, 마녀였어.

잔에 다시 와인을 따르고, 소시지도 잘라준다. 배가 고팠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는다. 큰일을 하려면, 배부터 채워야 해. 그래야, 기분도 좋고, 하는 일도 잘 돼.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먹은 그릇도 말끔하게 치웠다. 얼굴이 발그레 물든 제이가 열심히 돕는다. 자, 이제 이 닦을 시간. 제이의 입에 칫솔을 물려주고, 나도 박박 닦는다. 취기가 도는지 제이가 자꾸만 생글생글 웃는다. 그러지 마아, 귀여워 죽겠으니까.

“디저트는 없어?”

“이까지 닦아놓고?”

“웅, 뭐가 허전한데?”

“그렇다면 마녀님, 절 드시지요? 바삭하게 잘 구운 늑대 맛 쿠키거든요.”

이토록 예쁜 제이가 와락, 품에 안긴다.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어. 제이의 따뜻한 심장박동을 온몸으로 느낄 날을. 작은 새 같은 제이를 꼭 끌어안는다. 

내일도, 그 내일도, 이렇게 빛나기를. 너와 함께 하는 모든 날들이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기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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