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MISS SNOW’ 헬싱키 빈티지 상점에서 깨달은 내 여행의 타이틀
헬싱키에는 하루를 꼬박 빈티지 상점 투어를 해도 될 만큼 각양각색의 특색 있는 상점들이 정말 많았다.
가이드북에 실린 상점들은 정말 일부여서 가이드북을 보고 관광을 하는 게 오히려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가이드북을 덮고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가게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렇게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 Kinnunem라는 상점을 발견했다. Kinnunem 빈티지 액세서리와 의류를 판매하는 곳이었고, 신상품을 진열해 둔 것처럼 정갈하게 다림질된 옷들과 깔끔하게 액세서리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마치 과거에 잃어버린 내 애장품처럼 마음에 쏙 드는 팔찌와 수줍음 많은 사장님이 추천해준 핀란드 디자이너 리이사 비탈리의 목걸이를 샀다.
사장님이 오래된 잡지로 만든 포장 봉투에 내가 산 액세서리들을 정성스럽게 포장해주는 사이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서울에 2번 정도 가본 적이 있다고 했고, 내게 핀란드 어디를 여행하고 왔냐고 물었다. 내가 사리셀카를 갔다 왔다고 하니, 그녀는 처음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로바니에미 근처라고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머릿속에 사리셀카를 떠올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 눈이 많이 왔냐고 물었다.
내가 아주 눈이 많았다고 하니, 그녀는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I MISS SNOW’라고…
그 순간 그 문장은 그녀가 내뱉은 어조까지 또렷하게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I MISS SNOW…’
가게에서 나와서 나는 그녀의 어조를 떠올리며 ‘I MISS SNOW’ 문장을 읊조렸다.
눈이 가득 쌓여있을 거로 생각했던 헬싱키는 서울보다 더 따뜻했고 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헬싱키에서나 서울에서나 눈을 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분명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겨울은 늘 눈이 가득했는데…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눈 쌓인 풍경은 고등학교 때였다. 운동장에 무릎까지 쌓일 만큼 많은 눈이 왔던 그때 이후로 그렇게 많은 눈이 온 적은 없었다.
쌓이긴커녕 최근 몇 년간 내리는 눈을 보기조차 정말 힘들어졌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겨울은 기억 속의 그때만큼 즐겁지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사람들이 북쪽 나라에서만 볼 수 오로라를 보러 여행을 떠나듯 머지않은 미래에는 눈을 보러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나처럼 그녀 역시 눈과 함께한 그리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을까? 짧은 문장 속에서도 그녀의 감정이 느껴졌다.
살면서 별거 아닌 순간이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우연한 만남과 말들이 있다.
단순히 ‘I MISS SNOW’ 이 문장에 공감을 했다기보다, 그 문장 안에 담긴 그리움이 내 기억 속의 그리움을 되살아나게 한 것 같았다.
내가 영어를 잘했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고... 언제나 눈이, 그리고 눈과 함께했던 그때의 추억이 그립다고...
나는 그 빈티지 상점에서 그동안 정처 없이 겨울 나라를 방황했던 내 여행의 타이틀이 정해진 기분이었다.
이 타이틀은 앞으로도 이어질 내 겨울여행들의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의 나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한 해를 정리하며 마침표를 찍기 위해 나는 매년 연말에 겨울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2019년과 2020년의 경계의 시간.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고 아무것도 새로 시작되지 않은 혼돈의 시간 헬싱키 전역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여행 내내 한 번도 시끄럽지 않았던 조용한 헬싱키와 헬싱키 사람들은 한 해 동안 쌓인 모든 것들을 일순 털어 내려는 듯 계속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불꽃과 폭죽의 폭발음, 연기로 밤하늘이 가득 차 있었다.
창 밖으로 불꽃놀이를 구경하다 건너편 건물에 불 켜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서재로 사용하는 방인지 책장에 책들이 가득했고 방을 따뜻하게 밝히는 스탠드 조명이 내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창 밖의 소란과 대비되는 그 따뜻한 풍경이 나의 시선과 마음을 오래 사로잡았다.
2019년이 마무리되고 2020년의 시작되는 그 시간, 나는 새해 첫 소원으로 저 아늑한 방 주인의 행복과 2020년 나의 한해도 모쪼록 저 방만큼만 아늑함과 평온이 함께하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