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획득한 모든 경험치가 초기화된 채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소속집단과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대학에 등록금을 낸 대가로 몇 년 더 학생 ‘신분’이 연장되었고 ‘친구’라는 인간관계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노력이 없다면 친구는커녕 사람을 만날 기회 자체가 줄어들 거란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내 신분과 소속집단은 모두 초기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대학 @@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 아니었고,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어디에 소속될지, 어떤 사회적 신분을 가질지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나와 함께 수업을 듣고 일상을 보내던 친구이자 동기인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신분이 초기화되어 각자의 길로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친구’, ‘친구 아님’으로만 라벨 되어 있던 인간관계는, 또래집단으로만 필터링되어 있던 인간관계는 이제 끝났다. 그러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더 이상 ‘친구’ 관계로 하루종일 고민하고 일상생활까지 지장을 주었던 시기 역시 끝이 났다.
‘친구’ 관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과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나의 생존 자체가 위협에 쳐해 지는 일들이 생겨났다.
게임으로 비유하지만 고생고생해서 레벨업 하고 경험치를 쌓아 놨는데 모든 게 다 초기화된 상태로 기존 스테이지의 난이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고난도의 스테이지가 예고도 없이 시작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때로는 가까이, 때로는 멀리서 나와 같이 싸워줬던 나의 친구이자 동기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혼자서는 절대 클리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스테이지에는 오롯이 나 혼자만이 존재했다.
처음부터 나를 만들어 가야 했고 나의 쓸모와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새로운 스테이지에서 나는 지금까지는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들과 경험해 본 적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친구는 아닌, 그렇다고 타인은 아닌 새로운 인간관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