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회사 생활을 도와준 NPC는 누구였나요?
‘학생’ 신분일 때까지만 해도 그저 ‘공부’를 하고 또래 ‘친구’ 들과 잘 어울려 지내기만 하면 됐지만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열심히만 하면 오롯이 내 성과가 되는 공부가 아닌 열심히 해도 내 것이 될지 알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내게 주어진다.
부단한 노력으로 레벨업을 해가며 여기까지 왔지만 20년 이상 쌓은 모든 경험치와 힘겹게 획득한 레벨은 사회, 직장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초기화돼버린다.
내가 얻은 모든 경험치와 무기들을 다 뺏겨버린 채로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되어 버리는 것이다.
요즘에는 어떤 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내가 게임을 할 때는 스테이지마다 NPC들이 있었다.
NPC들은 주로 게임 속 상점 주인이나 길거리 행인이었고 헤매고 있는 초보 게이머들에게 친절한 설명과 함께 미션 수행에 도움이 되는 힌트들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무능력한 내가 회사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건 나중에 어떤 관계가 되건 처음 만나게 되는 NPC에 따라 회사 생활의 첫인상이 달라질 것이다.
나의 NPC는 첫 회사 경리팀의 ‘윤정언니’였다.
나는 사업팀으로 입사를 했지만 사실 입사초기만 해도 팀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신입사원인 나 그리고 이사님. 이렇게 2명밖에 없는 팀이었다.
사실상 사수가 없는 채로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고 멘붕에 빠져 있던 나를 챙겨줬던 사람이 윤정언니였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이미 경력직 2명이 일주일도 못 채우고 그만둔 자리였고 신입사원인 내가 얼마나 버티겠냐 했던 마음에서였는지 입사초반에 윤정언니는 내게 살갑게 대해주진 않았다. 친절하긴 했지만 마냥 친절하지 않은 약간 깍쟁이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중에야 업계에서도 나름 알려진 회사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전 부서를 통틀어 직원이 20명도 안 됐을 때였다. 이사님이 내게 업무지시를 하긴 했지만 그 업무를 어떻게 누구와 확인해서 처리해야 하는지까진 알려주진 않았고 회사에서 내가 의지할 사람은 윤정언니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회사에서만 10년을 일했던 윤정언니는 회사의 안방마님 같은 존재였고 그녀의 코치로 나는 크게 사고 치지 않고 하나하나 일을 해결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입사한 지 2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부터는 내가 혼자 아등바등 버티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언니도 이것저것 먼저 나서서 나를 챙겨주었다.
아주 사소한 회사 생활 안내(근태, 전화, 프린터기 사용법 등)부터 업무 관련 사항까지...
윤정언니는 당시 나의 사수도 상사도 아니었지만 옆에서 나를 가장 많이 챙겨주고 가이드해 준 사람이었다.
당시 10년을 일했음에도 제대로 된 직급이 없었던 그녀를 나는 ‘언니’라고 불렀었고 (회사가 커지고 외부에서 '직급'을 달고 들어오는 경력직 직원들이 늘어나고 나서야 회사에서 언니에게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아 주었다) 내가 회사 다니면서 누군가를 ‘언니’라고 불렀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러서인지 그녀와의 관계는 직장 동료라기보다 선 후배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직장 선배이자 언니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녀에게 회사생활을 배웠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냐에 따라 ‘회사생활’에 대한 인상이 확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남들보다 더 험난한 스테이지에서 처음을 시작하게 된 나를 불쌍히 여겨 하늘에서 내려준 NPC였는지도 모르겠다. 상냥하고 무엇보다도 누군가 억울한 꼴은 보고 있지 못했던 정의로운 윤정언니.
그녀 덕분에 나는 가장 힘들다는 첫 회사 생활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그녀를 떠올리면 특유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면서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회사에 다닌 지 벌써 15년에 가까워 오면서 그간 여러 사람을 겪다 보니 당시 그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고 인정 많은 사람인지 더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첫 출근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우리 팀 막내를 보며 아주 오래 전의 내 모습과 그런 나를 지금의 나처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만큼은 못하겠지만 그녀가 내게 해주었던 것들을 떠올리며 누군가의 나쁘지 않은 NPC가 되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