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허 절벽의 안내자
렌터카 픽업 지각의 결과, 경차에서 SUV로?!
시차 적응이 안 된 탓인지, 누적된 피로 탓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8시에 렌터카 픽업 후 모허 절벽으로 이동해야 하는 일정이었는데, 일어났을 때 이미 8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어제 기네스 하우스 때도 그랬고, ‘몇 분 정도는 양해해 주겠지. 일단 예약은 해두었으니까...’라는 안일한 생각에 느긋하게 씻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렌터카 회사에 가서 예약증을 보여주니 내가 늦게 왔기 때문에 예약해 둔 차는 이미 취소되어 렌트가 불가하다고 했다. (영어를 잘 못하기에 사실 직원이 말하는 걸 다 이해하진 못했다.)
오늘부터 렌터카를 타고 아일랜드를 여행할 계획이라 렌터카를 빌리지 못하면 전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상태였다. 출발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여행을 망치는 건가 싶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직원분이 남아 있는 SUV가 하나 있는데 이거라도 렌트를 할 건지 물었다.
SUV를 렌트할 경우 기존 예약 비용에서 추가 금액만 지불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고민할 것도 없이 오케이를 외치고 SUV를 빌렸다.
사실 경차가 비용이 더 저렴하기도 했지만, 초행길이고 고속도로를 제외하곤 길이 좁다는 이야기를 봐서 일부러 경차로 예약해 두었던 건데...
지금까지 SUV는 한 번도 운전해 본 적이 없어서 마치 운전대를 처음 잡는 것처럼 긴장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출발 전 버튼을 잘못 눌러 보닛이 열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어영부영 출발하다가 근처에 있던 직원분이 달려와 닫아 주기까지 했다.
무슨 정신으로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도로에 차가 별로 없고 복잡하지 않았던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더블린 시내를 빠져나와 톨게이트로 진입하기 직전 옆에서 트럭이 빵빵하길래 보니까 내가 아마도 트럭 같은 대형차들이 진입하는 입구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뭔가 잘못됐구나’라는 것만 알아차린 채 얼른 차선을 바꿔 다른 출구로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영어도 못하는데 익숙하지도 않은 SUV를 운전해서 여행을 올 생각을 하다니...
‘무식하면 용감하다’가 아니라, 내가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상태라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
다행히 톨게이트를 통과해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나서는 ‘운전’만 하면 되는 상태였다.
운전석이 반대인 걸 제외하면 운전 자체는 우리나라에서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도로에 차가 거의 없어서 좀 긴장을 풀고 편히 운전할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그제야 내 귓가에 닿기 시작했다.
양들도 소들도 한가롭게 노니는 모허 절벽
렌터카 여행의 장점은 내 마음대로 이동 경로를 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전에 알아봐 둔 CLIFFS OF MOHER COASTAL WALK CAR PARK에 주차를 했다.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관광안내소가 있는 주차장이 아니어서인지 한적했다.
모허 절벽 올라가는 길 중간쯤에 위치한 주차장은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주차비로 5유로 정도를 받고 있었다. 남은 동전들을 모아 주차비를 내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모허 절벽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라곤 널빤지로 툭툭 무심하게 만들어둔 CLIFF WALK THIS WAY 표지판 하나가 전부였다.
분명 어떤 건물도 없이 뚫려 있는 길이었음에도 모든 길이 길로 규정된 공간이 아니어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가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일단 위로 올라가다 보면 뭐든 나오겠지 하고 걷다가 막다른 울타리를 만나 돌아 나오기도 하고,
트랙터를 탄 아저씨가 무언의 몸짓으로 안내해 준 방향으로 걷기도 하며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올라가는 길 한편으로 울타리 같지도 않은 울타리 너머에 양들과 소들이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동료가 되어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앉아 있고 싶을 정도로 부럽기 그지없는 삶이었다.
모허 절벽의 안내자
윈도우 바탕화면 그 자체인 평화로운 언덕을 다 올라가니 모허 절벽이 나왔다.
올라오는 길의 평화로운 풍경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거대한 절벽이었고, 절벽이라기보다 거대한 벽과 같은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벽으로 단절된 이 세상의 끝을 바다가 끊임없이 두들겨 절벽 주변엔 잔잔한 파도가 치고 있었다.
‘멋있다’라는 느낌보다는 어쩐지 공허하고 쓸쓸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코스가 아니어서인지, 아니면 관광철이 아니어서였는지 나를 포함해서 열 명 정도밖에 사람이 없어서 더 한적하게 느껴졌다.
모허 절벽은 오브라이언 타워를 기준으로 좌우로 길이 나뉘어 있었다.
좌측 길은 절벽 가까이 가보는 게 가능했고, 우측 길은 낮은 울타리와 철조망에 막혀있고 출입금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좌측 절벽 길을 관광하고 우측 길 울타리 앞까지 갔다가 안내문을 보고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는데 울타리 근처에 있던 한 할아버지가 관광객들에게 말을 거는 게 들렸다.
“어디서 왔어?”
“독일이요.”
“여기가 진짜 모허 절벽을 볼 수 있는 곳이야. 여기서 보는 모허 절벽이 진짜 절경이라고.”
“하지만 들어가지 말라고 통제해 두었잖아요.”
“여기 옆에 틈으로 넘어오면 울타리를 넘을 수 있어. 이 틈으로 넘어와.”
“위험해 보이는데요?”
“아일랜드까지 와서 여기를 안 보고 가는 건 진짜 아일랜드에 왔다고 할 수 없어.”
짧은 영어 실력으로 해석해 보건대, 할아버지와 커플 관광객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커플은 결국 할아버지가 안내해 준 틈으로 넘어가서 통제해 둔 지역으로 넘어갔다. 커플들이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길을 내려왔다.
그들의 대화에 호기심이 일어 길을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멈춰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할아버지의 미소와 말에 사로잡혀 다시 내려왔던 길을 올라가 울타리를 넘었다.
‘얼마나 좋길래 모르는 사람들을 붙잡고 권유할 정도일까. 그래, 아일랜드까지 왔는데 내가 여기를 언제 다시 와보겠어. 가보지 뭐...’
여행지에서 가급적 위험한 일은 하지 말자 주의인데, 할아버지의 말이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울타리와 철조망 자체가 높지 않았기에 울타리를 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어느덧 언덕 아래로 내려가 있었고, 카메라 줌을 당겨 보니 여전히 흐뭇한 미소로 자신의 안내에 따라 우측 절벽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바로 절벽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꽤 절벽을 향해 걸어가는 코스였고 우측에서 본 절벽이 좌측절벽보다 좀 더 크고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좌측에서 봤을 때는 막혀 있는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측에서 보는 모허 절벽은 단절된 벽이 아니라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너른 장막이었다.
이곳에서는 공허함과 쓸쓸함보다는 바다를 막아서는 강한 대지의 기운이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을 붙잡고 가보라고 했는지,
그들이 이곳을 보지 않고 가는 걸 안타까워했는지 이해되는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