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

당신의 뇌는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

by MissP

조각나버린 인형이
멀쩡하다고 상상하는 것.


내 품 안에 있는 오래된 인형이 거울에 비친 모습에 놀라 떨어뜨린다. 어느새 조각난 인형은 갈갈이 형태를 잃어 마치 인체의 조직처럼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 끊어진 모습이면 차라리 흉하지 않으련만. 인형은 찢기지 않으려고 발악이라고 한 것인지, 조각난 팔다리가 독일 소시지처럼 바닥까지 끌린다.

지금 들고 있는 인형은 팔인가? 다리인가?


착각.

우리는 많은 것들을 착각하고 산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당신이 매우 취약해진 순간, 그 강도는 심해진다.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생존이다. 사람은 착각함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호감을 품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만나고, 희망을 품고, 절망을 느끼고, 다시 일어서고, 나아간다. 수많은 인간관계는 기대와 착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건 인간의 생존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우 동떨어져있다.


나는 꽤나 많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줄 안다. 그러나 그 결과, 타인은 나의 따뜻함에 자신의 짐을 떠넘긴다. 그래도 괜찮다고 내가 힘들 때는 들어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버티다 보면 어느새 그들은 나에게 맡긴 짐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더 많은 것들을 내게 맡기기를 원한다. 내가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을 때는 되려 나를 원망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느 순간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


내가 잘못된 걸까?

누군가는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나에게 기술이 없다고 한다. 누군가는 나에게는 때가, 사람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말을 모두 내 방식대로 수용했다. (그렇다고 바보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제일 따뜻하고 사람이 제일 무섭다.


내가 짐을 맡은 이유는 하나다.


생존.


내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기적인 선택임과 동시에 그 선함이 내게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 생존할 수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관심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생존방식을 잃어버리고는 각자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하지 않는다. SNS, 온라인 카페, 온라인 메신저, 게임 메신저 등등 말이다. 심지어 유튜브 역시 영상만 보다가 댓글을 남기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불필요하기 때문에.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온라인 소통을 하기 시작했다. 시점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나와 생각이 비슷하다고 느낀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앞으로도 나는 괜찮을 것임을 스스로에게 다시금 알게 해 준 사람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사람의 생각들 역시 배우들의 역할극처럼 거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너무 힘들었던 상황이었고, 불면증과 번뇌로 밤을 새우는 날이 거의 매일이었고, 그 고독감이 스스로를 잡아먹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온라인 소통은 생각보다 모르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관계로, 공간의 제약 없이 소통한다는 것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고, 평상시에는 하기 어려운 토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 크나큰 장점이었다. 그렇지만 곧 깨달았다.


이 방식이 나를 좀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의를 잃어버린 방식의 대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소모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나는 진심이었고, 때문에 나를 소모하는 것은 대면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상냥한 거절과 미려한 인간적 호감을 구분하였지만,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처음에는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잡으려고 나름 몇 번을 노력했다.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며 자책했다. 온라인에 남겨진 내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의미가 없는 것 마저도 내 의도와는 다르게 다른 뜻을 지니고 상대에게 전해졌고, 곡해한 상대방의 태도는 나를 죄책감에 위축되고 당황하게 만들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깨달은 것은 역시 나는 이런 대화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굴을 보고 있다면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련만.


그렇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 아닌가? 나는 다시금 친해지고 싶은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비슷한 결론을 얻었다. 거기에 이번에는 나의 변화 역시 있었고 나의 결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누군가 건넨 의무적 따스함에 나는 꽤 많은 부분을 기대었다.


대면은 사람들이 직접 마주 보기 때문에 말하는 이의 뉘앙스, 표정, 제스처에서 느껴지는 긍정과 부정의 소통이 존재한다. 때문에 보다 간접적으로, 우아하고도 예의 있게 거절할 수도 있고,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인간적, 이성적 호감을 표현할 수도 있다. 심지어 지나친 블랙조크도 말하는 이의 표정과 뉘앙스, 입 끝에 올라붙는 미소까지 그것이 짓궂은 농담인지 우리는 상대를 보면서 느낄 수 있다. 물론 예의 없는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이지만, 자신의 체면치레가 많기 때문에 그 수가 온라인에 비해 현저히 적고,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의 어떤 비틀린 점을 자극하는 것일까? 온라인은 보다 과감하고 직접적이며 공격적으로 행동하고 받아들인다. 평상시에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 상스러운 대화가 아무렇지 않게 오간다. 또한 상대에 대한 무례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를 수도 있다. 거기에는 굉장히 많은 비난과 자신의 울분이 담겨있다. 이런 문화를 크게 겪지 않고 피해왔던 나부터 혹은 나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나이가 많은 윗세대나 또는 이 문화를 수없이 겪어온 어린 세대까지 모두 사람의 소양과 교양을 어디다 팔아먹은 것처럼 행동한다.


근묵자흑.

사람이란 정말로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이어서 어느 순간 스트레스가 쌓인 나의 언행이 과격해지고, 똑같이 행동하려고 한다. 그로 인해 그 과정에서 또다시 스스로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받아들임의 강도는 스스로 인지하는 친목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고, 서로의 표정을 보며 관계를 읽고, 서서히 쌓아가는 친밀도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온라인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된다. 단순히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때로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짙은 농담을 주고받는 꼴을 보거나 혹은 다투고 서로를 힐난해도 돌아서면 끝이다. 서로의 친밀도는 쌓이지 않는다. 마치 모래성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더욱 고독감에 빠져든다.


나 같은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세상의 발달을 따라가기에 나는 많이 느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다. 거기에 나의 성정과 성격, 특징들이 결합되며 한층 더 그러하다.


온라인 속 수많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지만 그들이 내 친구라 할 수 있을까. 내가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줄까. 허무하기 그지없는 관계는 파도 한 번에 모래성처럼 부서질 것이다.


온라인이란 공간 속에는 내가 없다. 나의 매력과 실제 나를 만났을 때 느낄 수 있는 에너지, 사랑스러움, 날카로움과 포근함, 밝으면서도 어두운 얼룩진 페르시안 카펫 같은 느낌은 온라인에서 반도 전해지지 않는다. 글이라는 아주 매혹적인 매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곳에는 나를 가장한 나를 닮은 가상캐릭터만 있을 뿐이고, 그곳에는 나의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없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친밀함을 느끼는 것일까?


그건 당신의 뇌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착각일 뿐이다. 당신의 뇌는 당신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고 생존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그렇다.


나는 내가 똑똑하고,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인 선택으로 타인에 대한 선량함과 베풂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비록 그 일들이 내게 보답받지 못하는 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렇지 못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의 선량함과 정직함에 이끌려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나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게 내 생존의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내 이런 진심과 생존의 방식이 온라인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되려 오해를 받기도 하고 공격당하거나 더 심한 내상을 입기도 한다. 나 역시 사람인지라 때로는 날카롭게 반응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건 결국 나를 상처 입힌다. 나는 가벼운 사람처럼 농담을 하고, 가벼운 그들의 행태를 따라 한다. 그리고는 곧 매섭게 덮쳐오는 허무함에 숨이 막힌다.


마치 마녀사냥하듯이 사람들은 모두가 천편일률적 사고를 하기를 바란다. 이성적 사고가 아님에도 이성적인 사고라고 주장하고 마치 교주의 말처럼 모두가 동일하게 반응한다. 사실 이 역시 생존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듯하다. 남들이 볼 때 어쩌면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럼에도 염증이 생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좀비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기존에 했던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차단하거나 지운다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창구를 닫아둠으로 인해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에서의 작은 끊어짐조차 나는 실제 연이 끊어진 것처럼 아프다. 나는 저런 방식이 익숙하지 않고, 맞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원래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끊어지는 것은 모래성 같은 관계가 아니라 내 마음이다. 진심을 다했던 나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우선으로 이 디스토피아에서 나를 보호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생존할 것이다. 그것도 매우 아름다운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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