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겪으면 드러나는 것들.

by MissP

지치고 힘들 때 혼자 무작정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워낙 조심성이 많고 내성적인 부분도 없잖아 있었기에 무엇보다 두려움이 앞섰지만, 이때가 아니면 못한다는 일념하에 평상시에는 부끄러워 꿈도 못 꾸던 것들을 하나하나 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기념사진도 찍어보고, 커다란 식당에 들어서 삼삼오오 모여있는 손님들로 북적이는 번잡함 속에서도 홀로 맛있게 식사도 해보고. 초행길로 헤맨 적도 있지만 나름 혼자서 한 첫 여행은 안전하고 성공적이었다.


그 경험이 내게 준 것은 그저 혼자서 한 여행이 아니라, 그 여행 속에 나를 안내해 준 수많은 사람들과 친절로 이루어진 같이 하는 여행이었다. 혼자서 한 여행은 내게 고된복감과 더불어 지친 심신을 달래준 고마운 사람들로 가득했다.


경험의 값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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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까지는 이미 한 10년 전에 쓴 부분이다. 뒷부분에 무엇을 넣을까 고민하다 최근 깨달은 바가 있어서 완성할 수 있었다. 경험이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인생이란 참 재미있는 거 같다.


무엇인가를 겪는다는 것은 꽤 충격적인 사건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시각이 발달하여 색색의 모빌을 바라볼 때의 그 충격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비록 그 경험에서 씁쓸한 상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은 큰 밑거름이 되어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다.


경험이 반복될수록 뇌는 익숙하게 판단하고 오류를 찾아 수정할 것이다.


내 첫사랑은 어린 시절 친구인데 그 친구를 생각하면 파란색과 흰색, 초록색이 섞여있다. 아마도 학창 시절에 그 친구와 겪은 많은 시간들 속에 쌓인 경험과 기억, 그리고 유독 기억에 남는 추억들이 섞여 만들어낸 색일 것이다. 어린아이의 풋사랑,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서투름과 눈빛만으로 서로 어렵게 꺼낸 마음.


그 그림의 색상은 처음 흰 도화지에 흰색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물들었다기보다 바탕을 채운 것이다. 그리고 짙은 파란색으로 크게 그림을 그리고 약간의 초록색이 섞여있다. 단지 세 가지 색으로 매우 예쁜 그림을 완성시켰다.


난 처음에 그 친구의 장면, 일면의 어딘가에 물줄기와 그 더운 여름, 매미소리와 눈앞의 풍경이 그런 기억과 색을 남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알았다.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살면서 그래도 몇 번의 데이트와 만남을 했지만 무언가 기억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혼탁함. 차마 색으로 표현조차 되지 않았다. 공허함. 그래서 그냥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인생에 색이 다시 나타났다. 어떤 의미로는 첫사랑이다.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번에 짝사랑을 했는데, 그러고서야 첫사랑의 색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초록색이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바탕에 핑크색과 노란색이 섞여있고, 저기 구석 어딘가 아주 조금의 검은빛을 띤, 그렇지만 검은색이라고는 할 수 없는 아주 오묘한 색상이 약간 있다. 이 친구를 꽤나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 웃기게도 그 어린 시절의 풋사랑만큼 서툴고, 설레며, 말도 못 꺼내는 바보탱이가 되어서 말이다. 전혀 전할 방도가 없었던 혼자만의 마음. 어쩌면 상황과 방식에 메여 스스로 안주하고자, 때를 기다리고자 했던 용기가 없던 마음이지만 말이다. (바보도 바보도 이런 바보라니!)


아마도 초록색은 희망을 상징하지 않았을까 한다. 저 아이와 미래를 함께 해보고 싶다. 언젠가, 내 개인 사정상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미가 없을, 하지만 어쩌면 매우 간절했던 스스로의 희망.


나는 처음에 노란색이 질투라고 생각했다. 나는 질투심이 매우 많고,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겨 보이고 예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노란색은 확실히 질투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노란색은 사실 불안함, 잃어버릴까 무서웠던 거였다. 소중함이 들어있었다, 그 색에. 그 소중함이라는 핵이 노란색의 중심이었고, 그걸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조건 속에 질투와 불안함이라는 것들이 핵을 감싸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씨앗의 중심부를 자르면 배아가 있는 것처럼. 노란색의 근원은 내가 좋아하는 감정, 소중함,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고, 그 배아를 지키기 위해 불안함이라는 마음과 질투가 보호를 하고 있던 건 아닐까 싶다.


내 연인을 생각하면 온통 핑크색이다. 그리고 밑에는 파란색이 깔려있고, 흰색과 노란색도 보인다. 그리고 다른 색들이 보이지만, 그건 두 사람이 서로 공유해 가며 채울 색깔들이다.


나는 언젠가는 그 친구가 그 그림을 같이 그려주길 바랐다. 언젠가 핑크색의 범위가 점점 커지고 초록색은 파란색으로 물들어가면서 온전히 둘만의 색깔이 창조되기를 바랐다. 손안에 씨앗이 싹을 만들어 나무가 되어 가기를.


정말 많이 좋아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내가 드러냈던 마음과 스스로 인식했던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그 밑에 무의식 속에 더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었음을 나도 몰랐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깜짝 놀랐다. 마음이 아프다는 걸 너무 강렬히 느껴버려서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좋아했다는 걸 알았다. 만약에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첫사랑의 색깔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서글펐지만 사실 알았다 해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거였다.


언젠가 내 인생에 다시 또 이렇게 색깔을 그려줄 사람이 나타나겠지 하고 생각한다. 분명히 내가 생각한 그 색깔로 그림을 그릴 거고, 그 사람이 생각한 그 색깔로 같이 그려나갈 생각이다. 그리고 그 연인 역시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내 첫사랑이 될 것이다. 분명 굉장히 따뜻한 색이겠지 싶다.


경험의 값어치.


모든 경험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반드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얻게 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지 나를 발아시켜 싹 틔우게 하는 건 틀림이 없다. 나는 앞으로도 아마 많은 경험을 하게 될 테고, 많은 것들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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