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이란.
어릴 적에 산 가방이 있다. 모 명품 브랜드의 제품이었는데 호보백 스타일로 휘뚜루마뚜루 막 메기 좋은 제품이었다. 표면 가죽이 에스닉한 느낌이 드는 제품이었는데 오늘 보니 한쪽이 완벽히 변색되어 까매져있었다. 아무래도 세월도 그렇지만 그만큼 오래 사용했다는 뜻일 것이다. 지퍼 부분 역시 가죽이 헐어 하얗게 변색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다는 것이 좋았다. 세월이 흐르면 변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말이다. 나는 굳이 이 가방을 닦아내거나 수리할 생각이 없다. 그냥 그대로 계속 사용할 생각이다.
어르신들과 얘기를 하면 느끼는 점이 있다. 예쁘다 예쁘다 하시면서도 정말 예뻐하는 느낌과 함께 자신의 젊은 날을 아쉬워하는 모습, 무의식적인 부러움 같은 감정들 말이다. 사실 나를 뭐 그렇게 부러워하고 하겠냐만은 그분들은 나에게 자신의 젊은 날을 일부 투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만 하더라도 굳이 남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피부 변화와 재생 속도, 예전의 나와의 다른 점에서 찾아오는 서글픔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릴 적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좋다. 물론 피부도 탄력도 모두 당연히 그때가 더 아름답고 곱겠지만, 지난 세월이 결국 나를 이만큼 자라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보다 젊고 더 탱탱한 여자인 내가 아니라 그 짧은 시절을 스스로의 즐거움을 크게 누리지 못하며 살아온 시간이다. (아마 어르신들도 비슷하겠지만.)
나이를 먹었다는 건 추하거나 흉한 것이 아니라, 그 세월 동안 무사히 삶을 살아내며 많은 것들을 감내하고 겪어내었다는 것이기에 나는 참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젊은 적 요절할 생각이 아니라면 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 언제나 괴로울 것이다. 나는 어르신들의 얼굴이나 다른 부분을 보며 한 번도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르신들 중 간혹 갑자기 시술을 받으시거나 나도 젊을 적에는 시어머니가 예쁘다 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며 지금의 자신은 늙고 세월에는 장사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그래서 알았다. 자신을 그렇게 느끼는 건 자신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내 낡은 이 가방처럼 손때 묻은 나 자신의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노라고. 언제나 과거만을 회상해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우리라. 내가 언젠가 지금보다 더 늙어 노인이 된다면, 나는 내 얼굴과 몸을 더 사랑하겠노라.
노인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 스스로를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아직 무언가를 시도할 용기가 부족하니까. 물론 여러 가지 상황들이 겹쳐 그렇겠지만, 확실히 예전의 나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을 수많은 작은 것들이 나 스스로를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데, 그건 내가 스스로 부끄럽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와는 상관없지만, 스스로의 상황에 초라해진 내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그 상황 자체가 부끄럽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나아지면 분명 잘 이겨낼 것이다.
그에 반해 아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서로 통통한 배를 누르고 깔깔 거리기도 하고, 코를 찔찔 흘리며 놀지만 누구 하나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수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자신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길 가다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면 경계심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사랑스러움이 얼마나 귀여운지 한 번 더 손을 흔들게 만든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아이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변하고 늙고 사라진다. 시기가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 날 뿐 우리는 모두 태어났기에 인생의 사계절을 거칠 것이고, 다시 봄을 겪으며 따스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노인의 계절은 주로 겨울에 비유되곤 하지만, 겨울이 없다면 애초에 봄이 오지 않는다.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고, 하얀 눈에 아침해가 비추어 눈이 부시기도 하다. 겨울 역시 아름다운 계절이다.
변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
지나가다 나이가 지긋한 부부를 보았다. 분명 두 분 모두 젊은 적이 훨씬 아름답고 예쁠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서로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걸어갔다. 참 보기 좋았다. 변하는 자신을, 변하는 내 사랑을 사랑하는 것. 두 분에게서는 변하지 않는 그것이 보였다.
아이들만큼 자신을 사랑하기에는 나는 세상에 적응해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므로 어려울 테지만, 어른의 시선으로 나를 사랑하면 나는 좀 더 웃으며 내 삶을 잘 걸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스쳐 지나간 가을바람 속 그 부부처럼 말이다.
나의 다음 계절과 당신의 다음 계절이 모두 아름답기를, 자신의 변화를 기꺼이 사랑하기를.